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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은 1950년대에 탄생하여 60여년의 역사를 이어오며 국내 공연예술계의 리더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국립극장의 탄생

경인부민관 - 서울시 중구 태평로 1가산극협의회 창립 준비를 토의중 1950년 1월 국립극장장실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모국어를 되찾게 된 연극인들은 열악했던 예술 활동에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국립극장 설립운동을 전개한다. 당시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극장의 영화관화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립극장 설립에 대한 예술인들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열정은 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같은 해 8월 국립극장 창설에 대한 대통령령 공포로 이어진다.

1949년10월21일 국립극장 운영위원회가 조직되고 초대극장장에 유치진(柳致眞, 1905-1974)이 임명된다.
국립극장의 장소는 서울 중구 태평로에 위치한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 건물)으로 정해지고, 1950년 1월 극장의 직속 협의기구인 <신극협의회>를 설치, 산하에 ‘신협’과 ‘극협’이라는 두 극단을 창단하였다.

국립극장은 민족연극예술의 정립과 창조라는 기치에 맞춰 개관 기념공연으로 역사극 <원술랑>(유치진 작)을 올린다. 이 공연은 초연 당시 약 5만 명의 관람객을 유치하여 신극 사상 최대 관객동원이란 기록을 남기게 되며, 연이어 올라간 제2회 공연 <뇌우>(조우 작)는 무려 7만5천여 명의 관객을 모아 개관공연<원술랑>의 기록을 갱신하였다.
당시 서울시민이 40만 명 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대단한 흥행기록이었다. 연장공연까지 이어진 <뇌우>공연에 이어 국립극장은 제3회 공연 <청춘의 윤리>를 준비하던 중 6.25전쟁을 맞이하면서 국립극장은 개관 57일만에 문을 닫게 된다.

피난시절의 국립극장

경인부민관 - 서울시 중구 태평로 1가

6.25전쟁으로 국립극장의 기능은 전면 마비되고 예술가들은 피난길에 오른다.
많은 공연예술가들이 피랍 또는 월북함으로써 모처럼 피어나려던 극장예술의 꽃봉우리는 된서리를 맞은 듯 한순간 흩어지게 된다. 그러나 전시(戰時) 중에 부산과 대구로 피난 온 예술가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들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들은 대구의 문화극장(이후 키네마극장)을 기반으로 공연활동 벌였고, 공연장은 초만원을 이룰만큼 대성황이었다. 그러다가 1952년 5월 국립극장은 재건을 위한 재정 법률안이 국회와 국무회의를 통과하면서 대구문화극장을 국립극장 건물로 사용하였다.
제2대 국립극장장으로 연극인 서항석(徐恒錫, 1900-1985)이 임명되었다. 그는 국립극장에 대한 모함과 공격으로 극장 폐지론이 나왔을 때 국회에 나가 의원들을 설복시키는 명연설을 하여 이를 저지함으로써 극장을 존속시켰다.
대구에 있던 시절 국립극장은 전속극단을 두지 않았지만 개관당시 활동했던 극단 신협 단원들을 중심으로 위문공연 등을 통해 활발한 공연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서울로 환도한 국립극장

서울로 환도한 국립극장

1953년 휴전과 함께 정부가 환도한 후에도 국립극장은 그대로 대구에 남아있었다. 국립극장이 개관 당시 사용했던 부민관 건물은 국회가 폭격 맞은 것을 개수하여 사용하고 있었고, 명동의 시공관(市公館)은 서울시가 계속 사용하였다. 그렇다고 새로운 건물을 지을 형편은 못되었다. 극장장 서항석이 최고위원으로 있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를 움직여 1957년 1월5일 정부 요로에 국립극장 환도 촉진 건의문을 제출하자, 문교부 당국은 적극적으로 환도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난제였던 극장 문제는 결국 시공관 건물을 서울시와 공동으로 사용하는 조건으로 1957년 6월1일 국립극장은 서울로 환도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국립극장은 명동의 시공관에 둥지를 틀고 개관하게 되었다.

대구에 있는 동안 전속극단이 없었던 국립극장은 극단 <신협>단원을 중심으로 다시 국립극단 전속단체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단원 대부분이 이탈하는 사건을 맞이하는데 당시 세계 연극계의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초대극장장 유치진이 본인이 한국에 없는 사이 ‘신협’이 국립극장의 전속극단이 된 사실에 놀라움과 분노를 느끼면서 <신협> 복원을 명한 것이다.
국립극장은 잔류한 <신협>단원과 기존의 단원들을 중심으로 1년여의 공연활동을 이어가다 다시 전속극단을 재구성하는 시도가 이뤄진다.
그리하여 국립극장은 두 개의 전속단체(신협과 민극)로 나뉘어 활동하게 된다.

명동 국립극장과 전속단체 창단

명동 국립극장

국립극장은 1961년 11월 서울 시민회관이 개관됨으로써 시공관을 극장전용 건물로 사용케 되어 총공사비 약1억8천만 환을 들여 내부 시설을 전면 개수하고 1962년 3월 새롭게 단장하여 명동 국립극장의 개관식을 갖는다. 리모델링을 통해 기존의 1,000석 이상의 객석을 800여석으로 축소하고 무대를 이전보다 1/3확장 하는 한편 오케스트라 박스를 신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회전식 무대, 자동 조명시설 등을 설치함 으로써 예술극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개관식에 맞춰 전속단체로 활동해오던 극단 <신협>과 <민극>은 재편성되어 <국립극단>이란 명칭으로 발족하고, 국립국극단(국립창극단의 전신), 국립무용단, 국립오페라단이 새로이 창단된다.
더불어 1969년 국립극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교향악단의 필요성으로 기존의 ‘KBS교향악단’의 명맥을 그대로 인수, 그 운영권을 이어받게 된다. ‘KBS교향악단’ 은 3관 편성 90여명의 단원으로 <국립교향악단(약칭, 국향)>으로 개칭하여 소속단체로 활동하게 된다.

남산국립극장

남산국립극장남산국립극장 전경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던 당시 정부에서는 남산을 중심으로 <종합민족문화센터>건립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에는 국립극장을 비롯하여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양성소, 예총회관, 국립중앙도서관, 현대미술관, 세종대왕기념관 등이 착공될 예정이었다. 가장 먼저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양성소(국립국악고등학교의 전신)가 1967년 12월 준공되었다. 이 건물은 이후 국립극장 별관으로 되어 현재 별오름극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1973년 8월 국립극장이 완성되면서 바야흐로 남산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남산의 국립극장 대극장은 명동의 구 국립극장의 무대보다 8배나 넓은 400평의 규모와 회전무대, 좌우 이동무대 등 당시 최첨단의 무대 시설을 갖춘 메머드급 예술극장이었다.
1973년 5월 국립합창단이 전속단체로 창설되고, 국립무용단은 이분화되어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으로 나뉜다. 또한 1972년 국고보조단체로 인수한 예그린예술단은 <국립가무단>으로 개칭되었다. 명동의 구 국립극장은 낙찰이 안돼 당분간 예술극장으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 국립극장 산하에는 최대 8개의 전속단체가 운영되다가 1977년 10월 국립가무단이 <시립가무단>으로 이관되고, 1981년 8월 국립교향악단이 한국방송공사(KBS)로 다시 운영권이 이관되었다. 1995년 국립관현악단이 창단되어 국립극장은 총 7개 전속단체를 운영하였다.

1999년 1월 29일 책임운영기관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이 공포(법률 제5711호)됨에 따라 국립극장은 2000년 1월 1일부터 책임운영기관이 된다. 전속단체로 있던 국립발레단과 오페라단, 합창단이 재단법인으로 독립하고 4개 단체(국립극단,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가 국립극장 소속으로 운영된다.
2009년 1월 1일부터 국립극장은 책임운영기관 제4기를 맞이하면서 예술성과 생산성, 국내외 교류협력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대표적 사업으로는 정오의 음악회, 국립극장 고고고, 국가브랜드공연, 청소년공연예술제,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을 비롯하여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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