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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호 Vol. 346

대결에서 스밈으로

우리 시대의 작곡가┃이건용 (1947~)

 

 

 

그의 작품에서는 국악에서 출발한 작곡가들이 흔히 국악이라는 명목으로 ‘국악 아닌 것’을 솎아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국

악 아닌 것’을 통해 ‘국악’이 될 때까지 밀고 나간 흔적과 노력만이 돋보일 뿐이다.


이건용의 국악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특히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시대의 ‘흐름’이 보인다. 그의 1970년대 작품 속에서 서양 현대음악과 국악은 몸을 섞는다. 1980년대, 그 누가 예술이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 하던가. 그의 작품은 ‘혼란한 시대를 먹고사는 위장’이 되어 사회와 함께 나아갔다. 그처럼 뜨거웠던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부터 그의 음악은 ‘작아지기 위해’ 노력했다. 사회를 향한 시선이 우리 삶의 일상과 내면으로 향하는 흐름은 2000년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건용은 40여 년 동안 20편 가까운 국악 작품을 작곡했다. 걸어온 길만 본다면 그는 국악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 같다. 서울예술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서양음악 작곡을 전공했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음악대학에서 유학했다. 귀국 후 교편을 잡은 서울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도 그는 외형상 서양음악을 가르치는 학과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하지만 이건용은 꾸준히 국악 작품을 지었다. 그 작품에서는 국악에서 출발한 작곡가들이 흔히 국악이라는 명목으로 ‘국악 아닌 것’을 솎아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국악 아닌 것’을 통해 ‘국악’이 될 때까지 밀고 나간 흔적과 노력만이 돋보일 뿐이다.

 

듣고, 묻고, 쓰던 성장기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난 이건용은 음악 애호가이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과 가까이할 기회가 많았다. 그의 곁에는 늘 노래가 있었다.
1950년 가족과 함께 월남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스스로 곡을 지어 불렀고, 서울예고에 진학해 정우현·김달성의 가르침을 받았다. ‘은혼에 부치는 노래’는 이건용의 첫 작품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곡이다. 아버지가 쓴 시에 이건용이 노래를 붙였다. 훗날 그는 “가사를 빼고는 슈베르트의 영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순진한 작품”이라고 회고한다. 중학교 시절 자신을 작곡가의 길로 결정적으로 접어들게 한 연가곡 ‘겨울 나그네’의 주인공 슈베르트는 사춘기의 중심에 있었다.


서울대 음대에 작곡학도로 입학한 그는 연극과 문학에 심취했다. 1965년 음악대학 내 연극반을 만들었고, 1967년 경향신문사에서 공모한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석기시대’로 당선되기도 했다. 연극이라는 광장의 예술을 통해 사람들을 만났고, 소설이라는 밀실의 예술을 통해 내면에 자신을 가둘 줄도 알았다.


그가 국악이라는 음악을 만난 것은 연극반에 가입한 김용만 덕분이다. 그의 권유에 따라간 명동 국립극장에서 ‘전폐희문’을 처음 접했다. 좋아하던 두보의 한시 ‘촉상(蜀相)’이 떠올랐다. 시에서 느낀 비극미가 음화(音畵)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이건용은 자신에게 외래어와 같던 국악에 살갗을 맞대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프랑크푸르트 음악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지도교수 하인츠 베르너 치머만은 베를린 슈판다우 교회음악학교(Spandauer Kirchenmusikschule) 교장 이력을 가진 교수다. 그를 통해 서양음악에서 중요시되는 종교음악과 합창의 기법을 빨아들였다. 다성음악적 짜임새, 가사를 다루는 수법, 성부의 서법 등등…. 훗날 작곡한 수많은 서양식 합창곡과, 합창과 국악관현악이 함께하는 ‘만수산 드렁칡’(1987)이 그의 대표작이 된 이유를 찾는다면 아마도 이 시기의 담금질 때문이리라. 그러면서 스승은 이건용에게 ‘당신다운 것을 쓰라’고 했다. 현대음악적인 것도 구사하면서 한국 전통음악을 내 작품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나의 숙제’이던 때다.

 

 

 

현대음악과 국악의 꺾꽂이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1970년대 작곡계는 1930년대생 김정길·강석희·백병동 등을 중심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양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그것을 국악기나 국악 양식과 접목했다. 이 시기 국립국악원은 서양음악 작곡을 전공한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작품을 위촉하기도 했다.


이러한 때에 이건용은 ‘분향’(1974)을 발표한다. 그의 국악 작곡기 중 첫 번째라 할 수 있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 초입을 대표하는 곡이다. 이 시기에 그는 클라리넷 독주곡 ‘독백’(1978), 합창곡 ‘Hallelujah aus der Tiefe’(1978), 관현악 ‘결’(1979), ‘E음으로부터의 전주곡’(1981) 등 현대음악 기법에 충실한 작품을 발표했다. 유학 이전에 작곡한 국악실내악 ‘분향’과 ‘촉상’(1975), ‘주역’의 개념을 음악으로 표현한 ‘건곤이감’(1976)에서도 현대음악 방식을 전통악기에 대입해보려는 경향이 강했다. 특히 14명의 연주자와 여창을 위한 ‘분향’은 서구식 현대음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반음계적 기법과 ‘수제천’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공존한다.


1981년 6월, 음악계에는 ‘제3세대’가 등장한다. 이건용과 황성호·유병은·허영한·진규영이 만들었다. 이건용처럼 서양음악을 짓는 훈련과 비슷한 문화적 성장 과정을 공유한 이들이다. 새로운 세대론과 정체성 작업은 이전 세대로부터 흘러오는 물줄기와 차별화로 시작되는 법. 창단 연주회와 함께 이들은 ‘제1세계의 음악 문화를 수입해야겠다는 생각에 몰두한’ 1세대와 2세대를 건강하게 비판했고, 선언문으로 “우리 스스로 이룩한 문화를 가져야 한다”라며 “3세대만이 갖고 있는 미래 있는 역사 참여”를 강조했다. 동인이지만 다섯 작곡가의 음악 스타일은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동인이 아니지 않냐는 의심도 받았다. 하지만 시대와 세대에 대한 진단과 문제의식은 공유됐다. 그것은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 좀 더 쉬운 기법에 대한 물음, 현실감을 껴안은 음악을 쓰자는 것이었다.


국악 작곡기 중 두 번째 시기인 이때, 그는 앞 시기보다 전통적인 어법을 더욱 많이 사용했다. 서양악기를 위한 ‘E음으로부터의 전주곡’의 ‘E음’ 자리에 국악의 12율 중 하나인 태주(太簇)와 남려(南呂)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관악합주 ‘태주로부터의 전주곡’(1980)은 다소 현대적인 어법으로 궁중음악풍 분위기를 시도하며, 초기의 서구적 실험에서 벗어나 전통적 어법으로 전환하려는 꿈틀거림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도기를 지나고 나온 ‘남려로부터의 전주곡’(1984)은 조금 과감히 말한다면 ‘이건용식 수제천’이라 할 수 있다.

 

전통음악으로 무엇을 말할 것인가
이 시기에 그가 보여준 남다른 행보는 사회와의 맞물림에서 발생했다. 고민도 ‘전통음악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서 ‘전통음악으로 무엇을 말할 것인가’로 점차 바뀌었다. 그는 1980년대 후반 들어 현실을 담는 작업에 집중했다. 양악으로는 성서 ‘시편’에 가사를 붙인 교성곡 ‘분노의 시’(1985), 국악 작품으로는 ‘만수산 드렁칡’이 대표적이다.


‘만수산 드렁칡’을 쓸 때 그의 연구실 밖에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고, 사회는 역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현실은 예술가에게 발언을, 발언이 아니라면 최소한 관심을 요구했다. 실내악 ‘시름-놀음’ 시리즈를 비롯해 ‘분노의 시’, 노래 ‘황색예수의 노래’(1986)와 ‘잠든 식구를 보며’(1987), 실내악 ‘분노와 비탄의 할렐루야’(1986), 합창곡 ‘오소서 평화의 임금’(1989), 국악관현악과 합창을 위한 ‘나는 너다’(1990) 등은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2012년 11월, 원일 지휘로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선보인 공연 ‘만수산 드렁칡’은 이건용의 작품 여섯 편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공연의 표제이자 그의 대표작으로 통하는 ‘만수산 드렁칡’의 가사는 황지우의 동명 연작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오 망국亡國은 아름답습니다”라는 탄식으로 시작하는 시어詩語는 낭송과 합창, 매기고 받기, 농악의 음향 등으로 지은 소리 속을 헤엄쳐 다니는 시어詩魚가 된다. 소설가 이인성은 황지우를 ‘진흙탕 속 미꾸라지’에 비긴 적이 있다. “시인은 유연한 정신의 몸놀림과 지느러미로 둔탁한 진흙의 세상을 뚫고 나간다. 그리하여 시는 막힌 시대에 구멍을 뚫고, 우리를 숨 쉴 수 있게 한다.” 이건용의 소리를 입은 시어는 당시 창작국악이 갇힌 고담준론의 장에 구멍을 뚫고, 사회의 공기를 공유했다. 음악학자 이미경은 그에게 “전통은 단순히 새로운 음향을 찾기 위한 소재”가 아니라, “자생적인 음악 문화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현실에 대한 인식, 청중과의 소통을 위해 해결해야 하는 과제”였다고 말한다.


이건용은 저서 ‘민족음악의 지평’(1986), ‘한국음악의 논리와 윤리’(1987)를 통해 자신의 입장과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그의 민족음악론이 담긴 저서는 당시의 음악가들이 읽고 사유해야 할 당대 음악론이기도 했다.

 

 

스밈의 미학
참여와 발언의 1980년대가 지나갔다. 이건용도 사회에 대한 분노와 눈물로 오른 ‘만수산’에서 내려왔다. ‘드렁칡’도 그의 발목을 더는 잡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산에 올랐다. ‘산곡’(1992)과 ‘청산별곡’(1995)이다. 전자는 국악관현악곡이고, 후자는 여창가곡·합창·국악관현악이 함께한 곡이다. “산은 우리의 미적 감각의 원천이요, 동경과 애환을 담고 있는 무엇”이라 생각하던 그는 이 곡을 통해 산의 굴곡과 농담의 섬세함, 자연스러움을 표현했다.


그의 시선은 어느 순간 우리의 내면과 정서로 향했다. 그것은 슬픔, 어머니의 이미지, 산을 바라보는 마음, 석양 같은 일상의 정서였고, 그러한 심상을 국악기가 노래하도록 했다. 이건용은 이를 ‘우리들 정서의 그루터기’라 했고, 이희경은 “정서의 원형질을 찾는 과정”이라고 했다. 클라리넷 5중주곡 ‘배따라기’(1992) 같은 서양악기를 위한 곡을 작곡할 때도 노래 속 애절함과 슬픔의 정서를 두루 살폈다.


그는 1997년부터 7곡의 ‘저녁노래’ 시리즈를 작곡했다. 이 연작은 변화하는 작곡가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은 음악’들이다. 독주나 실내악을 위해 만든 이 작품들에 대해 이건용은 “밀도가 묽어지고 반복이 많은 음악”이며, 일상에 “스며드는 음악”이라 말한다. 그는 민족음악론을 펼쳤고, 이와 같은 논리에 부합하는 작품을 만드는 데 힘썼다. 이춘미는 작곡가가 이 연작들을 통해 특별히 무엇인가 주장하지도, 청중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설령 두 대의 가야금과 현악합주를 위한 ‘저녁노래IV’(2000)가 국악관현악을 위한 버전(2001)으로 더 크게 편곡돼도 ‘작은 음악’의 미학은 여전하다. 그 소리들은 이건용식 ‘깨달음音’이다. 편하다. 그래서인지 1980년대의 생각을 담은 그의 저서 ‘민족음악의 지평’과 ‘한국음악의 논리와 윤리’가 전투하는 자세로 읽어내야 할 책이라면, 일상-음악론인 ‘작아지기 위하여’ ‘대결에서 스밈으로’가 수록된 저서 ‘나의 음악을 지켜보는 얼굴들’(2005)은 한결 편한 어조로 삶과 예술을 돌아보게 한다.

 

*작품에 기재된 작곡 연도는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의 ‘한국 작곡가 사전’과 국립국악원의 ‘한국음악 창작곡 작품목록집’을 따릅니다.

 

송현민 음악평론가. 음악을 듣고 글을 쓰며 부지런히 객석과 책상을 오가고 있다. 급변하는 음악 생태계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 미래를 ‘기획’하는 자료가 된다는 믿음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림 권준 일러스트레이터


참고문헌

이건용 ‘나의 음악을 지켜보는 얼굴들’, 민족음악연구회, 2005. 

이미경 ‘도전, 혹은 스밈’, 예종, 2007.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한국현대 예술사대계IV’, 2004. 

이희경 ‘한국 현대음악의 담론적 배치에 관한 연구-네 작곡가의 전통 담론을 중심으로’, 음악학 15권, 2008.

 

백병동·이건용의 해금과 기타를 위한 작품집 ‘후조(後彫)’
천지윤(해금)과 이성우(기타)가 함께 녹음한 음반으로, 이건용의 ‘해금가락’(1995)과 ‘해금가락2’ Ver.1·2가 수록돼 있다. 이건용은 특히 해금 연주곡을 많이 썼다. 수록곡은 1990년대 이후 작품으로, 일상에 스며들도록 작아진 음악들이다. 그래서일까. 노래하듯 편하고 노을처럼 배어든다. 밥알의 사이가 느껴지는 고슬고슬한 밥처럼 천지윤의 해금도 음악에 담긴 작곡가의 뜻을 잘 살리고 있다. 동봉된 백병동은 ‘제3세대’ 동인에 앞선 2세대다. 두 작곡가의 묘한 차이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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