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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1월호 Vol.348

시와 창의 경계에서 서사의 집을 짓다

SPECIAL┃연출가 박지혜

이역만리 이국땅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창극으로 소환하는 발칙한 시도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누구나 처음 들으면 귀를 의심할 만큼 상상을 벗어난 도전은 박지혜에게서나 나올법한 일이다.

 


칠레의 민중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제목처럼 어쩌면 우리 삶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로 버무려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반대로 절망의 노래 스무 편이 삶을 짓누르는 가운데 어렵사리 피어오른 사랑의 시 한 편이 생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지도.


각자의 삶은 그 나름의 구구절절한 서사를 지니지만 장식을 거둬내고 군더더기를 지우고 나면 은유와 함축으로 담백해진 시이며 그러기에 삶과 시는 공통분모의 두께가 두껍지 않아도 늘 맞닿을 수 있고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이런 관념적 표현으로 가득한 문장을 꺼내놓는 것은 어쩌면 시와 창극의 만남이, 그것도 머나먼 남아메리카 땅에서 피어난 시어들이 창극 무대에 펼쳐진다는 상상이 낯설고 당혹스러운 탓이다.


대자연과 에로스를 탐구하고 자유를 갈망했던, 이역만리 이국땅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창극으로 소환하는, 발칙한 시도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누구나 처음 들으면 귀를 의심할 만큼 상상을 벗어난 도전은 박지혜에게서나 나올법한 일이다.


소설을 재료 삼아 군더더기를 거둬내고 기름기 쭉 뺀 무대로 강렬한 잔상을 만들어냈던 박지혜는 새로울 신(新)자가 더해진 신창극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반대로 함축과 은유의 시어를 출발점으로 삼기로 했다. 시어를 재료로 서사의 집을 짓는 과정은 그동안 그녀가 많은 작품에서 해왔던 것처럼 배우와 창작 과정을 공유하고 결정하는 공동창작 방식을 거친다. 이를 위해 2018년 8월, 워크숍을 통해 창극 배우 유태평양과 장서윤이, 연극 배우 양조아와 양종욱이 작품에 합류했다.


다른 배경을 가진 네 명의 배우와 연출은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밑동 삼아 시에 대한 감상과 떠오른 이야기를 덧붙이고 조립하며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야기는 창작자 다섯 명의 생각이자 삶이며 관객과의 공통분모를 찾아 나설 서사다.


인터뷰에 앞서 얻은 정보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재료로 삼는 창극이 될 거라는 점. 기승전결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역할에 치중하기보다는 ‘소리하는’ 배우의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내며 관객과 교감하는 무대를 만들겠다는 연출의 포부 정도였다. 워크숍도 이제 막 발을 뗀 상황. 기자도 연출도 1월에 태어날 아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손에 잡히지 않는 백지상태에서 코끼리 뒷다리를 만지며 거대한 기둥을 상상하듯 추상화 한 편을 덩그러니 끌어안고 대화를 시작했다.


인터뷰는 지난 12월 초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무엇이라도 상상하고 어떠한 집이든 지을 수 있을 듯한 맑은 얼굴의 박지혜를 닮은 공간이었다.

 


INTERVIEW

신창극시리즈 첫 번째 기획인 ‘소녀가’(연출 이자람, 2018)에선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했고 이번엔 연출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두 작품을 거치며 새로운 창극이라는 게 무엇인지 답을 얻었나요.
‘판소리 만들기 자’를 통해 ‘추물/살인’(2014) ‘이방인의 노래’(2015) 등 판소리 단편선 연출은 몇 번 했지만 창극은 처음이에요. ‘소녀가’ 드라마투르그를 맡으면서 창극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에게 질문하고 또 고민했어요. 막연히 한 명의 소리꾼이 나와서 여러 역할을 하는 것은 판소리고, 여러 소리꾼이 나오는 건 창극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1인 모노 창극을 내놓으면서 창극의 정의나 지평을 넓혀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창극은 무엇이다, 이래야 한다는 정의를 내리지 않으려고 해요. 창극보다는 ‘새로울 신新’ 자에 방점을 찍어보려고 합니다.

 

창극이라면 하나의 완성된 서사가 있어야 한다는 게 관객 대부분의 생각일 겁니다. 그런데 창극 ‘시詩, Poetry’가 칠레의 민중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소개로 한다고요. 먼저 시를 택한 이유부터 얘기해볼까요.
물론 극에는 서사가 중요하죠. 하지만 저의 고민은 새로운 서사 형태, 좀 더 신선하고 감각적인 드라마 구조예요. 처음부터 시를 떠올린 건 아니었어요. 시보단 소설로 극을 만드는 데 익숙해요.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찾아봤죠. 보통의 창극이라면 이야기가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소리를 만들어 살을 붙이잖아요. 등장하는 캐릭터는 그 줄거리 위에 있다 보니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고요. 이런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서사 형태를 찾던 중에 신창극시리즈 연출을 맡게 됐고, 제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재료를 찾다 보니 시에 이르게 됐어요. 고등학생 시절 제 꿈이 시인이었는데 지금까지 왜 한 번도 시를 재료로 극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이런저런 상상을 해봤는데 꽤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올 것 같아요.

 

그럼 왜 파블로 네루다였나요.
소설을 재료로 극을 만들면서 저는 늘 작가와 공동창작 한다고 생각해요. 아리엘 도르프만(‘죽음과 소녀’, 2014), 기 드 모파상(‘모파상 단편선-낮과 밤의 콩트’, 2015), 유진오(‘여직공’, 2015) 등이 저와 함께 일한 거죠. 그런데 공동창작을 아무나와 같이 할 수는 없잖아요. 보통 그 작가와 내가 통하는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직관적으로 작가를 선택하곤 하는데 네루다의 글에서 나는 향기가 저와 딱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배우들과 공동창작을 하는 건가요.
물론이에요. 이미 유태평양·장서윤·양조아·양종욱 네 배우가 함께하는 공동창작 워크숍을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조합으로 진행하는 워크숍 자체가 저에게 가장 큰 도전 과제가 될 거 같아요. 지금까지 저는 양손프로젝트 연극과 ‘판소리 만들기 자’의 판소리 단편선만 작업해봤는데 이번에는 연극 배우는 물론 창극 배우와 ‘함께’ 극을 만드는 거잖아요. 한 달 남짓한 기간에 함께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며 새로운 서사 구조를 만들어 갈 예정이예요. 몇 차례 워크숍을 진행해본 배우들이 창작 과정을 불편해하지 않고 재미있다고 해서 가슴을 쓸어내렸죠.

 

공동창작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요.
결국 무대에 서는 건 배우잖아요. 관객으로서 저는 항상 배우의 고유하고 내밀한 지점이 무대에서 보이는 순간을 기대해요. 단순히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게 아니라 그 사람 고유의 성질이나 성격 같은 게 드러나면 매력적이잖아요. 특히 공동창작을 하면 배우 자신의 말과 언어가 재료로 쓰이니까 무대에서 자기 것을 보여준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어요. 배우가 진정한 무대 위 창작자가 되는 순간이죠.

 

이번 작품이 박지혜 연출에게도 그렇지만 양손프로젝트 배우들에게도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은데요.
양조아 배우는 연습 전부터 설렌다고 하더라고요. 저 역시 재밌을 것 같았어요. 사실, 누가 연출을 맡는다고 해도 소리하는 배우들과 창극을 만든다고 하면 아무래도 떠오르는 이미지라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양손프로젝트의 배우들이 함께 한다면 상상 너머의 것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냥 판소리와 유사한 작업을 한다는 생각에 그치고 싶지 않더라고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벗어나서 신선한 영역에 도전해보자, 내가 가진 것 이상을 끄집어내서 써보자’라는 생각이에요. 그러려면 나에게 창작의 원천이자 동력이 되는 양손프로젝트의 영역을 가져와 보자는 결론에 이른 거죠. 비슷하면서도 다른 장르의 배우들이 어떤 결과물을 낼 수 있을지 궁금해요. 또 이야기하다 보면 불현듯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기대도 되고요.

 

판소리 연출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이자람 씨가 단편소설로 판소리를 만들고 싶다며 찾아왔어요. 당시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1인극을 많이 했던 터라 제안을 받고 저 역시 재미있을 것 같아 수락하면서 판소리극 연출에 도전하게 됐죠.

 

다른 장르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의 소리가 어떻게 섞이고 버무려질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데요.
소리라는 건 전통 소리꾼에게서만 나오지 않죠. 외마디 비명일 수도 있고 웃음소리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물론, 판소리의 장단을 익히고 있긴 하지만 양손프로젝트의 배우들이 소리꾼 흉내를 내진 않을 거예요. 배우들 각자가 지닌 몸의 소리나 말이 무대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고 싶어요. 각자의 소리가 솔로로, 듀엣으로, 트리오나 콰르텟으로 표현될 때, 그것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앙상블이 만들어질 것이란 기대가 생겨요.

 

박지혜 연출이 그리는 창극의 미래는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창극을 하는 배우가 좀 더 다양한 모습이면 좋겠어요. 국립창극단의 작품에서도 중요한 건 소리나 이야기보다 무대 위 배우의 존재라고 보거든요. 이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다양한 움직임과 소리 그리고,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지, 그 고정관념을 넘어서야 창극의 미래도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서은영 ‘서울경제신문’ 문화레저부 기자. 공연 담당 기자가 된 지 2년 남짓. 기자보다는 관객으로, 취재보다는 감상을 위해 공연장 찾기를 꿈꾼다.


사진 전강인
장소협조 앤드하리 한남 www.instagram.com/andhari.han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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