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그저 시로만 남아 있지 않는다. 우리 삶과 예술 곳곳에 녹아들어 또 다른 의미로 태어나길 반복한다.
이제 시와 창극이 만난다. 시를 노래하는 창극을,
국립창극단과 박지혜의 손에서 새 의미와 생명을 입게 될 네루다와 그의 시들을 기대한다.
태초에 시가 있었다. 인류에게 언어가 주어진 이후, 모든 문화권에서 인간은 사랑과 열정, 희망과 좌절, 일상의 의미를 리듬이 깃든 언어로 낭송했고 그것은 글자로 기록돼 ‘시’로 불렸으며, 가락이 붙어 ‘노래’가 됐다. 그러므로 모든 노래는 시를 담고 있다. 20세기 들어 작사가라는 새로운 역할이 생겨나기 전, 작곡가는 시인의 시집을 뒤적여 영감을 얻었고 마음에 드는 시 구절에 곡을 붙였다. 시란, 가곡(Lied.Chanson.Canzone)의 전제였다.
시와 노래의 관계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시는 노래에서 표현의 근원이 되는 수단이지만 때로는 그 자체만으로 표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시에 관한 노래’가 그렇게 해서 생겨난다. ‘시’를 주인공으로 출연시키는 노래들이다.
작곡가, 시인을 관찰하다
슈만의 가곡집 ‘시인의 사랑’은 이 점에서 독특하다. 1830년대, 20대의 젊은 작곡가 슈만은 열병과도 같은 감정의 폭풍에 휩싸여 있었다. 스승의 딸 클라라 비크와 사랑에 빠졌는데 스승이 두 사람의 사랑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런 격정의 시기에 슈만은 독일 낭만주의 문호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집 ‘노래의 책’을 읽고 깊이 공감한다. 하이네는 사촌동생 아말리에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고통을 이 시집에 투영했고, 그 절절한 구절들이 슈만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슈만은 이 시집의 ‘서정적 간주곡’ 부분에서 열여섯 편의 시에 아름다운 선율을 붙이고 ‘시인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곡집으로 발표했다. 하이네의 시들은 줄거리도 없고, 순서도 없이 사랑의 시작과 좌절, 길게 남은 고통을 노래한 것이었지만 슈만은 열여섯 곡을 하나의 줄거리가 이어지듯이 주의 깊게 배열했다.
가곡집은 ‘아름다운 오월에’라는 사랑의 시작과 설렘을 담은 노래로 시작하지만 일곱 번째 곡 ‘나는 원망하지 않으리’에서 사랑의 파국을 암시하며 분위기가 일변한다.
“나는 원망하지 않으리/ 가슴이 부풀어 터지더라도/ 영원히 잃어버린 사랑이여/ 나는 원망하지 않으리/ 네가 다이아몬드의 빛으로 꾸밀지라도/ 그대 마음의 어둠을 비춰줄 빛은 없으리/ 네 심장을 먹어치우는 독뱀을 나는 보았네.”
이어지는 아홉 곡은 사랑의 상실로 상처 입은 짐승처럼 아프게 노래한다. 마지막 곡은 ‘싫은 옛 노래’다.
“싫은 옛 노래/ 불쾌한 꿈/ 모두 땅에 묻어 장사 지내자/ 커다란 관을 가져오라/ 그 관은 하이델베르크의 큰 술통보다 커야 한다/ 이유를 아는가?/ 내 사랑의 꿈을/ 그 관에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가곡집이 독특하다고 한 것은, 하이네는 각각의 시를 1인칭으로 썼지만, 슈만이 하이네의 시를 새롭게 배열함으로써 이 가곡집은 시의 작자作者를 관찰하는 관찰자의 시점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이네가 순서 없이 쓴 시들은 슈만에 의해 사랑의 시작에서 좌절, 포기까지를 그리는 일관된 줄거리를 갖게 됐고, 이 가곡집은 ‘시인에 대한 노래집’ ‘시인의 좌절된 사랑을 노래하는 노래집’이 됐다.
오페라 속 낭만의 시, 혁명의 시
시인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 시를 짓는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 크리스마스이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난한 청춘들의 사랑 이야기,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에 ‘시인이 말하는 시인’이 나온다. 지극히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색채로 포장돼 있지만, 여러 세대에 걸친 시인의 마음은 이 오페라에 묘사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로돌포는 아직 인정과 명성을 얻지 못한 젊고 가난한 시인이다. 하숙방 친구들은 모두 성탄을 즐기기 위해 카페로 나가고, 그는 혼자 남아 원고 마감에 여념이 없다. 이때, 미미가 방문을 두드린다. 촛불이 꺼져 불을 붙이러 온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두 사람의 초가 모두 꺼지고, 마침 그녀가 열쇠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암흑 속에서 더듬거리며 열쇠를 찾다가 서로의 손이 닿는다. 시인은 여인의 손을 부여잡고 “작은 손이 차군요. 녹여드리고 싶어요”라며 자기가 하는 일을 소개한다. 고금의 예술 작품에 등장하는 ‘시인의 자기소개’ 중에서도 상징적인 장면이라 할 만하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짧게 말씀드리지요/ 들어보시겠어요?/ 난 누굴까요? 난 시인이랍니다/ 무엇을 할까요? 글을 씁니다/ 어떻게 살까요? 그냥 삽니다/ 즐거운 가난 속에서/ 귀족 같은 사치를 누리며/ 사랑의 시와 찬가를 짓지요/ 꿈을 꾸고 상상하며 공중누각을 짓는/ 내 마음은 백만장자랍니다.”
우연히도 푸치니의 ‘라보엠’이 세상에 나온 1896년, 시인이 주인공인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오페라 역사에 등장한다. 격정파 작곡가로 불리는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다. 주인공은 시인이지만, 오페라의 배경은 언뜻 시인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혁명기의 프랑스다. 오페라의 제목과 제재는, 실제 프랑스 혁명기에 활동했고 혁명의 광풍 속에 처형된 시인 앙드레 셰니에(1762~1794)를 모델로 했다.
이 오페라에는 주인공 셰니에가 부르는 두 곡의 중요한 아리아가 있다. 두 아리아 모두 앙드레 셰니에가 남긴 시를 이탈리아어로 각색하고 곡을 붙인 것이다. 첫 번째 곡은 1막의 혁명 발발 전, 귀족의 파티에 초대된 시인 셰니에가 시 한 수 선보이라는 사람들의 종용에 응하며 당대의 현실을 꼬집는 통렬한 풍자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장면에 부른다. 두 번째 곡은 마지막 막에 등장한다. 시인은 정치범으로 감옥에 갇혀 있다. 그는 처형을 기다리며 마지막으로 ‘절명창’ 또는 ‘사세가(세상을 떠나면서 또는 떠나기 직전 부르는 노래)’라 할 수 있는 아리아 ‘오월의 아름다운 날처럼’을 부른다.
“바람 속에 입맞춤이 전해지고/ 햇살이 애무하는, 오월의 아름다운 날처럼/ 그러나 그것 또한 지평선 넘어 사라지나니/ 나 또한 운율의 입맞춤을 받고/ 시의 애무를 받으며/ 내 존재의 봉우리에 올라섰어라/ 인간에게 지워지는 운명에 따라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내 마지막 문장은 끝을 맺으며/ 사형 집행인은 내 삶의 끝을 명할 것이니/ 그러려무나, 나의 시, 궁극의 여신이여/ 아직도 빛나는 시상은 불타오르고/ 나의 심장은 차갑게 죽어가려는 자에게서 한 줄의 시를 끌어낼 것이다.”
가요에 나타난 시와 생명의 예찬
한국인이 사랑하는 가요 가운데 시인 또는 시가 빚어지는 과정이 담긴 노래를 살펴보자. 가수 정태춘의 데뷔 앨범 ‘시인의 마을’(1978) 타이틀 곡은 이후 이 아티스트가 짚어가는 사색과 때로 우울과 현실에 대한 혐오, 세상의 변화를 향한 격렬한 외침 대신 자연과 합일하며 생명을 향한 희망을 찾아나가는 시인의 신선한 목소리를 담아낸다.
“창문을 열고 음 내다봐요/ 저 높은 곳에 푸른 하늘 구름 흘러가며/ 당신의 부푼 가슴으로 불어오는/ 맑은 한줄기 산들바람/ 살며시 눈감고 들어봐요/ 먼 대지 위를 달리는 사나운 말처럼/ 당신의 고요한 가슴으로 닥쳐오는/ 숨 가쁜 자연의 생명의 소리/ 누가 내게 따뜻한 사랑 건네주리오/ 내 작은 가슴을 달래주리오/ 누가 내게 생명의 장단을 쳐주리오/ 그 장단에 춤추게 하리오/ 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사색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1980년대 한국 발라드의 대명사로 불리며 가수 이문세와 호흡을 맞춰 시대를 노래한 작사·작곡가 이영훈도 시를 노래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이문세 5집(1988)에 실린 ‘시를 위한 시’다.
“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져도 그대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내가 눈감고 강물이 되면 그대의 꽃잎도 띄울게/ 나의 별들도 가을로 사라져 그대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내가 눈감고 바람이 되면 그대의 별들도 띄울게/ 이 생명 이제 저물어요 언제까지 그대를 생각해요/ 노을진 구름과 언덕으로 나를 데려가줘요/ 나의 별들도 가을로 사라져 그대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내가 눈감고 바람이 되면 그대의 별들도 띄울게.”
국립창극단의 신창극시리즈3 ‘시詩, Poetry’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어를 새로운 연희어로 태어나게 하는 시도다. 앞에 소개한 ‘시를 담은 노래’들에서 시는 관찰되고 취합되며 배열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렇게 해서 시는 세상에 흩뿌려짐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용되고 변주되면서 또 다른 의미로 태어난다. 국립창극단과 박지혜의 손에서 새 의미와 생명을 입게 될 네루다를, 그의 시들을 기대한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아니,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파블로 네루다, 시詩)
글 유윤종 ‘동아일보’ 음악전문기자와 문화부장을 지냈고 서울국제음악콩쿠르 사무국장과 서울시립교향악단 ‘SPO’ 매거진 편집장을 맡고 있다. 낭만주의 시대의 교향악과 음악극에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으며 ‘푸치니: 토스카나의 새벽을 무대에 올린 오페라의 거장’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