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 인도네시아.
섬마다 간직한 오랜 역사와 다양한 이야기가 그림자극에 촘촘히 담긴다.
와양 쿨릿은 마음속 깊은 애환을 어루만지며 삶을 이어갈 힘을 준다.
하늘의 별만큼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에는 그 만큼 많은 수의 이야기가 있다. 내가 인도네시아에 반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다양한 이야기로 촘촘하게 공연되는 와양 쿨릿(Wayang Kulit)에 있다. 와양 쿨릿은 인도네시아 전통음악인 가믈란 반주에 맞춰 하얀 천막 뒤에서 여러 캐릭터의 인형을 조종하며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그림자극이다.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됐다.(2008년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에 통합됨)
삶과 함께하는 다채로운 축제
인도네시아에는 공연과 더불어 볼거리가 아주 많은데 특히 발리는 1년 내내 풍성한 축제가 일상에 함께한다. 거리에서 인도네시아 전통 의상을 차려입고 모자에 꽃을 단 남자들을 거듭 마주치게 된다면 근처 사원에서 축제가 있다는 것이니 여행자로서 운이 퍽 좋은 셈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살펴보면 아마도 수북하게 쌓아 올린 제물을 머리에 이고 사원으로 향하는 여인들의 행렬에 깜짝 놀랄 것이다. 작은 체구에 색색의 제물을 머리 위에 높게 쌓아 올린 여인들의 모습은 발리에서만 만날 수 있는 진풍경이다.
와양 쿨릿을 직접 만난 곳 역시 오달란 축제가 열린 힌두 사원에서였다. 오달란은 건립 기념일에 진행되는 대규모 종교행사로 210일 주기인 우쿠 달력을 기준으로 행해진다. 발리에는 2만여 개의 힌두 사원이 있고 사원이 건립된 날이 각기 다르니, 사원의 건립 기념일 행사인 오달란은 발리에서 비교적 자주 벌어지는 축제다. 우쿠 달력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을 위해 발리의 관광 안내소에서는 각 사원에서 오달란이 진행되는 날짜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오달란은 사원의 재량에 따라 축제의 규모·시기·기간·주제가 조금씩 다르게 진행된다. 축제가 열리는 동안 마을에서는 가믈란 연주가 끊이지 않고, 주민 모두가 사원을 향해 기도한다. 오달란의 목적은 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 음식·물질·건강 등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온 것이라 여기며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제물을 올린다. 여성은 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곱게 단장하고 제물을 만들어 바치는데, 제물 외에 예술적인 재주도 공양한다. 가믈란 연주와 발리 전통춤인 바롱 댄스(Barong Dance), 케착 댄스(Kecak Dance) 등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지고 와양 쿨릿도 그중 하나다.
1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와양 쿨릿은 변사 역할을 하는 달랑이 인형을 조종하며 스토리를 전개하는 전통적인 그림자극으로, 자바섬과 발리섬에서 널리 공연되는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공연예술이다. 인도네시아어로 ‘와양’은 그림자를, ‘쿨릿’은 가죽을 뜻한다. 와양 쿨릿에 쓰이는 가죽 인형은 장인이 정교하게 만든다. 암컷 버펄로 가죽에 정을 이용해 구멍을 내 큰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다채로운 색을 덧입히며 인형의 관절 부분이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다. 지금은 전깃불을 이용하지만 과거에는 흰 막 뒤에서 코코넛 램프를 켜고 극을 진행했다. 램프와 스크린 사이에서 인형을 조작하며 그림자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발리에서 한 달 살기를 실행 중인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숙소에서 조금 먼 곳으로 가보기로 마음먹고 오달란 축제를 구경하러 힌두 사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달랑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나의 소원이 마법처럼 이루어졌다. 사원 마당까지 들어와 멈춰 선 트럭에서 유명한 달랑 중 한 사람인 카크 진셍(Kak ginceng)과 만났다. 가난하지만 꼿꼿하게 자신의 예술 인생을 지켜온 선비 같은 모습의 그는 10시간이 넘게 진행되는 와양 쿨릿의 스토리와 노래, 그리고 다양한 캐릭터를 꿰뚫고 있는 명인이다.
명인의 트럭에는 수십 개의 인형이 가득 들어 있었다. 오달란 축제가 벌어진 힌두교 사원 한쪽에 소박한 무대가 설치됐고, 명인이 직접 인형을 움직이고 동시에 노래와 대사를 소화하며 공연이 진행됐다. 그는 손과 발에 작은 도구를 끼고 장단을 쳤는데 사용하는 인형이 꽤 많아서 보통 내공이 아니고서는 공연을 이끄는 게 쉽지 않을 듯했다. 명인 옆에는 그와 함께 극 전체를 완벽하게 꿰고 있는 조수가 적절한 순간 명인의 손에 인형을 쥐여 주었고, 좁은 무대 한 편에서는 가믈란 밴드가 노래의 반주를 맡았다.
와양 쿨릿은 저녁부터 새벽까지 하룻밤을 꼬박 새워 공연 하며 공연은 약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먼저 캐릭터 소개와 캐릭터 간 충돌이 시작되는데 이는 대략 자정까지 지속된다. 극의 중반에 접어들면 치열한 전투와 음모·갈등이 3시간 가량 이어진다. 새벽이 될 즈음 갈등이 점차 해소되고 마음 따뜻한 화해와 우정이 그려지며 이야기가 끝난다. 오직 인형으로만 장시간 공연하는데, 제법 방대한 내용임에도 극적인 구성과 짜임새를 갖추고 섬세한 표현 기법 등으로 완성도 높은 공연을 만든다. 이때 인형을 조종하는 동시에 모든 등장 인물의 목소리를 다르게 변조하며 극을 이끄는 달랑의 역할이 무척 중요하다. 기나긴 공연 시간을 오롯이 지켜온 그에게 쌓였을 깊은 내공을 잠시나마 접해보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고금을 뛰어넘어 사랑받는 전통예술
1035년에 지어진 인도네시아의 옛 서사시 ‘아르주나위와하(Arjunawiwaha)’에는 “가죽을 조각해서 만든 와양이 움직이고 말을 하면 사람들이 와양의 움직임에 따라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근거로 하면 11세기경에는 와양 쿨릿이 이미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와양 쿨릿을 즐겨 본 건 비단 인도네시아 대중만이 아니었다. 세계적인 흥행을 거둔 뮤지컬 ‘라이온 킹’에도 인도네시아 그림자 인형극의 기술이 녹아 있다. 실제로 ‘라이온 킹’의 디렉터이자 디자이너인 줄리 테이머는 5년간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와양 토펭(Topeng·가면), 와양 쿨릿, 그리고 와양 고렉(Golek·나무)에 대해 공부했고, 인도네시아 의상과 가면을 ‘라이온 킹’의 캐릭터에 적용해 다른 뮤지컬과 차별화했다.
발리 지역의 달랑은 와양 쿨릿의 최고 예술가인 동시에 종교적인 사제 역할을 겸하고 있어 주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그림자(와양)가 되어 나타나고, 와양이 신이나 선조를 부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질병이 유행하거나 지진 등의 재앙이 계속되면 그림자극의 힘을 빌려 해결을 도모하기도 했다. 와양 쿨릿의 스토리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인도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를 주된 테마로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더욱 다양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인도네시아를 여행할 기회가 생긴다면 와양 쿨릿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욕야카르타의 소노부도요 박물관에서는 매일 저녁, 발리의 오카 카르티니 호텔에서는 매주 금요일에 와양 쿨릿 공연을 만날 수 있다.
글·사진 현경채 음악인류학 박사, 영남대학교 겸임 교수. 여행하며 현지 음악을 탐닉하는 것을 좋아하며 방학 때마다 긴 여행을 떠나고 있다. 저서로 여행 중에 만난 음악 이야기를 담은 ‘배낭 속에 담아 온 음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