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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미르 상세

2019년 03월호 Vol.350

디아스포라의 잔향

SPECIAL┃작곡가 양방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그를 수식할 수 있는 명확한 단어는 오직 ‘음악가’ 뿐이다.

고려인 무덤의 광활한 풍경을 국악관현악이라는 지평선 위로 펼쳐낼 음악가, 양방언의 첫 번째 국악관현악은 어떤 모습일까.

 

 

 

‘음악가’ 양방언. 사람 양방언에게 걸맞은 수식어는 이토록 간단하다. 간단해서 더 무겁다. 그를 가둬둘 광대한 말이란 ‘음악가’뿐이기 때문이다. 팝?록?일렉트로니카?서구식 관현악?아시아 월드뮤직…. 인류 음악의 광활한 영토를 적토마 탄 듯 종횡하는 맹장에게 ‘음악가’라는 투구는 무겁되 가벼워야 할 것이다. 최근 국립극장 뜰아래연습실에서 만난 이 음악가가 미국 인더스트리얼 록 밴드 ‘나인 인치 네일스’ 얘기를 꺼냈다.

작년 일본 서머소닉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봤는데 역시나 대단했어요. 저는 ‘The Fragile’(1999) 같은 앨범을 내던 시절의 리더 트렌트 레즈너가 정말 좋거든요. 위험한 시기의 레즈너라고 할까요. 엄청나게 멋있는 리프(riff)를 많이 만들었죠. 국악이든 서양의 관현악이든 장르를 막론하고 어떤 계열의 음악에도 영감을 줄 만합니다.

 

양방언 자신의 작업 얘기를 잠시 접어두고 필자와 이런 음악 여담을 나눌 때 그는 늘 아이처럼 해맑고 뜨거우며 조금 수다스러워진다. 이를테면 아이슬란드 포스트록 밴드 시규어 로스의 공연이며 미국 실험 록 밴드 배틀스의 음반에 대해서 말할 때 그랬듯이.


양방언은 지난해 난생처음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랐다. 3월에 방송할 KBS 3?1운동 10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아리랑 로드’에 출연한 것이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카자흐스탄의 알마티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보람은 컸다. 다큐멘터리에 쓸 음악을 확장해 교향곡 ‘디아스포라’로 발전시켰다. 양방언이 처음 만든 국악 다악장 교향곡이다. 3월 2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여는 공연, ‘양방언과 국립국악관현악단-Into The Light’에서 공개할 작품이다. 양방언은 “힘들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면서 특유의 소년 같은 웃음을 지었다.

 

다큐멘터리 촬영은 긴 여정이었겠어요.

10일 정도의 여정이었어요. 1937년 스탈린의 명에 따라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17만 명의 고려인이 있어요. 그 길을 일부나마 따라간 것입니다. 바이칼 호수도 들렀고요.

 

느낀 것이 많았겠습니다.
제가 이번에 경험한 횡단열차 여행도 참 쉽지 않았는데 당시 고려인들은 몸도 더 고되고 마음까지 막막한 상황에서 긴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해봤습니다.

 

‘디아스포라’ 교향곡의 중심 악상은 러시아나 카자흐스탄 현장에서 떠올린 것인지요.
가기 전에 미리 머릿속 상상을 바탕으로 곡을 일부 만들어뒀어요. 그런데 막상 가서 느낀 소회가 커서 기존의 곡에 새로운 것을 더해 완성했죠. 마지막 여정이 알마티 외곽의 황야였습니다. 360도 파노라마로 지평선이 펼쳐진 그 광활한 곳에 거대한 고려인 묘지가 있어요. 거기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죠. 현지의 고려인 클래식 기타리스트와는 아코디언으로 합주도 했어요.

 

 

 

양방언은 이 대목에서 옆에 둔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를 열어, 무덤의 조감 영상을 보여줬다. 어둠과 슬픔을 다룬 대작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엄하고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묘지 앞에서 연주하려니 자연스럽게 레퀴엠같이 비장한 단조 선율을 붙이게 됐어요. 거기에 아리랑을 입혔죠. 아리랑이 신기한 점은 선율만 들으면 밝은 느낌이 드는데 단조 악곡에 입혀도 어색하지 않다는 거예요. 환경과 모체만 잘 만들면 약간만 구조를 바꿔도 어디에나 잘 흡수되죠. 무덤가에서의 연주는 ‘아리랑 로드-디아스포라’의 윤곽이 처음 보인 순간이었어요. ‘아리랑이 이런 식으로도 다른 음악과 공존할 수 있구나’ 하고 느낀 새로운 발견이었죠.

 

국악관현악에 도전하는 것은 처음이죠?
네. 실은 굉장히 부담스러워요. 제가 예전에 했던 작업은 서양 관현악에 국악기가 들어가는 정도였거든요. 그것도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함께라니 부담이 되죠. 그러나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과감하게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다악장 교향곡 도전도 처음이고요?
네. 그래서 계성원(국악 작곡가 겸 지휘자) 씨가 편곡을 도와주고 있어요. 함께 논의하며 서양 악기를 기점으로 작곡된 음악을 어떻게 국악관현악으로 전환할지 연구하고 있죠. 수많은 가능성의 창문을 열고 닫는 중이에요.

 

이전에 교향곡을 구상하거나 작곡해본 적이 있나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죠. 일전에 독일의 쇼트 뮤직(Schott Music)에서도 제게 작곡을 의뢰한 적이 있어요. 베토벤 9번 교향곡의 악보도 관리하는 세계적인 음악 출판사죠. 하지만 실현되지는 못했어요.

 

평소에 좋아하는 교향곡이 있다면요.
물론 베토벤도 좋아하지만 라벨?스트라빈스키?쇼스타코비치를 특별히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에서 힌트를 얻지는 않을 겁니다. 제 속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악상을 국악관현악단에 맞는 곡으로 완성해 갈 겁니다. 서양 음악을 경유하기보다는 직선으로 가보고 싶어서요.

 

미리 보여주신 작곡 노트에는 ‘디아스포라’ ‘선고’ ‘잃어버린 아리랑’ ‘아리랑의 이상향’ 같은 제목이 악장마다 붙더군요. 어떤 의미인지요.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현장을 방문한 것이 제게는 큰 영향을, 어떤 면에서는 충격을 줬습니다. 갑작스럽게 강제 이주 선고를 받고 바로 이역만리로 떠나야만 하는 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 여정을 쫓으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자연스레 구체적인 이미지가 그려졌습니다. ‘고단한 이동 중에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견디지 않았을까?’하고, 그 장면이 영화처럼 머릿속에 펼쳐진 거예요.

 

그렇다면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리듬 같은 것도 음악에 투영됐을까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에 보면 단두대 소리를 묘사한 장면이 나오잖아요.
지금 이것을 다 말씀드리면 곤란한데요. (웃음) 맞습니다. 지금처럼 좋은 열차가 아니다 보니 당시 열차에서 나오는 리듬과 악센트는 좀 어색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상상을 하자 미니멀 음악과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스티브 라이히의 ‘디퍼런트 트레인(Different Trains)’이 떠오르네요.
그런 측면도 있을 수 있죠. 목적지를 향하는 방향성은 일관되지만 거기에 결합되는 리듬은 일정하지 않죠. 그 위에 흘러가는 선율이나 분위기로서 고통과 같은 여러 감정을 담았어요. 차창 밖으로 스치는 것은 아리랑일 수도 있고 다른 슬픈 선율일 수도 있죠. 아마 횡단철도 부분이 가장 인상적인 악장이 될 겁니다. 이러한 표현을 국악기로 어디까지 해내느냐가 지금의 과제예요.

 

공연의 부제를 ‘Into The Light’로 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998년에 발매한 제 2집 제목이죠. 저는 앨범 타이틀을 정할 때, 단순히 앨범 명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제가 음악을 계속해나가는 과정에서 키워드가 될 단어들을 마치 사진으로 찍듯이 앨범에 박아 넣어요. 1집은 ‘The Gate of the Dreams’였죠. 게이트를 열고 어디로 갈 것인가, 그 답이 ‘Into the Light’였습니다. 2집부터 영국 런던에서 오케스트라 녹음을 하기 시작했거든요. 제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첫 음반이었죠. 당시엔 어디로 갈지 몰라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어요. ‘열심히만 한다면 반드시 어딘가 좋은 데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 시기의 혼란과 기대가 이번 국악관현악 작업을 하며 다시 생각났습니다. 실은 이번에 고민이 너무 많아서 도망가 버릴까도 생각했거든요. 어디로 갈지 확신은 없지만 국립국악관현악단과 반드시 빛을 향해 갔으면 하는 바람을 ‘Into The Light’란 부제에 담았죠.

 

마침 ‘Into the Light’ 앨범에 실린 곡 ‘아리엔느의 실’이 이번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요?
아리엔느의 실은 수많은 실이 엉켜버려서 한쪽 끝을 당겨도 해결되지 않는 뭉치를 뜻합니다. 강제 이주 후에 물리적으로는 고향에 돌아갈 방법이 없지만 어떻게든 해법을 찾아나가는 고려인들의 상황을 상상해봤어요. 여기에 미니멀 음악의 방법론을 사용하고 국악기 선율로 실을 구상했습니다. 그것을 아주 약간씩 움직이되 멀리서 보면 전체가 움직이도록 묘사했어요. 아주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아리랑으로 해결하죠.

 

‘아리랑의 이상향’이란 악장 제목도 인상적입니다.
어려운 현실을 이겨낸 사람들이 위로를 받은 노래가 아리랑이었죠. 그날 무덤에서 연주하면서 이 아리랑이 이제 미래를 향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사람들이 추구하던 희망, 그리고 이상적인 아리랑의 연주 형태를 상상해 이 악장에 넣으면 의미가 크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교향곡도 지금 만들어낸 형태 그대로 정형화되지 않고 변화하고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다양한 편성으로 해석되거나 장래에 악장이 늘어나도 좋을 것 같아요. 책임을 지고 음악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양방언이 지금껏 테이블 위에 켜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그제야 닫았다. 고려인 무덤의 광활한 풍경이 순식간에 스크린이라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비현실적 순간이었다. 찰칵, 마음으로 찍어뒀다. 잔상이 남았다. 교향곡 피날레의 아스라한 잔향처럼.

 

임희윤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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