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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7월호 Vol.354

여우락이 걸어온 길

SPECIAL┃10년을 맞이하며

해를 거듭할수록 색채를 더해온 여우락 페스티벌.

2010년부터 지난 9년간 쌓아온 성장 기록을 여우락을 만들고 지켜봐온 이들의 입을 통해 반추해본다.

국립극장 오지원 CP, 우다슬·이서정·차경연·안지선 PD, 대중음악 평론가 김학선, 음악평론가 송현민이 함께했다.

 

 ★  2010~2019년 '여우락 페스티벌' 포스터

  

2010
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
2010년, 국립극장에는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 어린이 우수공연축제 등 크고 작은 축제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우樂(락) 페스티벌’(이하 여우락)은 그중 한켠을 차지하며 시작됐다. 제1회 여우락은 9월 2일부터 11일까지 열렸으며 공명·노름마치·소나기 프로젝트·들소리가 무대에 올랐다. ‘타악’을 기반으로 ‘월드뮤직’을 표방하는 단체들이었다.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국악계는 월드뮤직과의 접속 지점을 모색하고 있었다. 2006년에 문을 연 (재)예술경영지원센터는 음악가들의 해외 진출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2007년 서울아트마켓은 월드뮤직을 구체적인 타깃으로 삼았다. 2010년 10월 코펜하겐에서 개최된 월드뮤직엑스포WOMEX의 개막 공연을 국악그룹 비빙Be-Being·바람곶·토리 앙상블이 맡기도 했다. 여우락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


“초청된 팀들은 해외 공연이 잦은 단체였는데, 오히려 국내에서 이들을 만날 수 있는 무대가 부족했고 그들도 시장의 한계와 공연에 대한 갈증을 많이 느끼던 때였죠. 조금 더 새로운 차원에서 한국음악을 만들고 소개할 ‘판’에 대한 바람이 극장 안팎으로 들고날 때였어요. 거기다 여우락만의 특별함을 위해 단체별 90분 이상의 공연과 마지막 날 ‘잼’ 콘서트(합동 공연)를 하기로 했습니다.”(오지원)


1980년대부터 진행돼온 ‘퓨전’이나 ‘크로스오버’ 등의 작업은 음악(국악)과 음악(양악·대중음악)의 섞임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문화적 코드로 부상한 일명 ‘컬래버레이션’은 국악계에서 사람과 그룹, 혹은 그룹과 그룹의 접속으로 가시화되고 있었다. 네 그룹이 축제의 마지막 날에 선보인 합동 공연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파격이었다. 여우락은 한국음악에 내포된 월드뮤직으로의 가능성을 점치는 자리와 같았다.

 

“여우락은 축제로서 지향해야 할 기준과 철학을 분명히 제시했다.

한국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하고, 세계와도 소통해야 한다는 것.”
- 송현민, 2010년 리뷰, 「미르」 2014년 6월호 -

 

“저마다의 색깔을 만들어가며 활동하던 민간단체들이 축제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와

그들의 색깔을 참신하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 윤중강, 2012년 리뷰, 「미르」 2014년 6월호 - 

 

2011
여기, 여우락이 있다!

‘여우락’이라는 이름이 조금씩 입에 감겼다. 하지만 그 뜻에 대해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이가 더 많았다. 여우락은 ‘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이 이름의 탄생 과정을 물으니 당시 기획을 맡았던 오지원은 “‘국악’이라는 단어를 제외한 채 새로운 한국음악 축제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죠. 카피는 ‘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와 ‘당신만 몰랐던 세계 속 우리 음악’ 두 가지였어요. 제목을 정할 때, 당시 한 선배가 한 글자씩 따보라는 힌트를 줬죠. 그래서 나온 이름이 ‘여우락’이에요. 처음엔 여우·여자를 연상하거나, ‘록’페스티벌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어요”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2011년에는 변화에 박차를 가했다. 9월에 진행되던 축제가 공연계의 비수기인 7월로 옮겨졌다. 첫 회를 장식한 공명과 들소리가 재초청됐고, 바람곶·토리 앙상블·양방언이 합류했다. 각 그룹마다 친분 있는 개인이나 단체를 게스트로 초청해 부분적인 컬래버레이션을 시도하며 완성도를 높였다. 신진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기회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여기에 소나기 프로젝트의 장재효가 음악감독을 맡아 모난 부분을 다듬질했다.


“주춧돌을 놓는 시기였어요. 밖으로는 누가 보아도 공력과 공신력을 지닌 음악가와 그룹으로 구성됐다고 입소문이 나도록 유도하고, 극장 내에선 여우락이 왜 국립극장에서 지속돼야 하는지에 대한 미션과 목표를 설정하고 공유해나갔습니다.”(오지원)


실제로 1년 사이 여우락은 관객의 입소문을 타고 비약적인 성과를 거뒀다. 패키지 티켓 구매 관객은 2010년 대비 3배로 늘어났고, 전체 객석 점유율도 10퍼센트 늘어난 77퍼센트를 기록했다. 여섯 개의 무대가 펼쳐진 가운데 폐막 공연이 큰 호응을 받았다. 여섯 무대를 빛낸 출연진이 함께한 잼 콘서트였다. 잼 콘서트는 향후 진행될 ‘여우락식 컬래버레이션’을 예언하는 시간과도 같았다.

 

 

“올해 라인업 구성이 가능했던 것 역시 여우락이 횟수를 거듭할수록 다져온 성과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양방언 예술감독이 던진 협업(컬래버레이션)이란 화두에 걸맞은 최적의 조합이기도 했다.

이제 슬슬 여우락의 본심이 무엇인지 드러내 본격적으로 브랜딩 해보려는 신호 같기도 했다.”
- 유춘오, 2014년 리뷰, 「미르」 2014년 8월호 -

 

2012
여우락은 교감이자 감응이다

1월 안호상 전 국립극장장의 취임은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전속단체인 국립국악관현악단·국립무용단·국립창극단은 그해 가을부터 시작될 ‘2012-2013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을 위해 오와 열을 새롭게 다듬었다. 상기한 극장 내의 여러 축제도 정비됐다. 선택과 집중의 노선을 취하던 안호상은 여우락에 집중의 수를 뒀다.


일정·형식·규모 면에서 예년보다 3배 가까이 확장됐다. 7월 3일부터 21일까지 미연&박재천 듀오·이자람·정민아·꽃별·연희집단 The 광대·타니모션·민속악회 수리·정가악회·AUX·노름마치 등이 참여해 21회의 공연이 열렸다. 예술감독이 생긴 것도 2012년이 처음이다. 이때부터 2014년까지 3년간 월드뮤직 분야의 대표 격인 양방언이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그의 활동은 작곡가 겸 연주자인 양방언과 여우락 모두에게 음악적으로 긍정적인 자극제가 됐다.


“여러 장르의 음악과 음악가들이 교차하는 여우락의 대표 얼굴이자, 참여 아티스트와 소통하는 것이 감독의 큰 역할이었어요. 음악가와 일일이 대화하며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새로운 한국음악에 대한 접근법을 모색했죠.”(오지원)


여우락은 레퍼토리시즌제에는 포함되진 않았다. 하지만 비시즌을 책임지는 프로그램으로 시선과 이목이 집중됐고, 이는 국립극장의 변화를 알리는 전야의 불꽃놀이와도 같았다.


축제의 개막작 ‘조상이 남긴 꿈’은 프리재즈의 미연&박재천과 안숙선·김청만·이광수가 함께한 공연이었다. 당시 국립극장 소셜 미디어 담당자 이서정은 “관객들이 이 조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했지만 결국 열광했던 공연”이라고 기억한다.
이외에도 2012년은 여우락에 첫 야외 공연이 도입된 시기이기도 하다. 아마추어팀도 참여할 수 있는 오픈 스테이지를 마련해 보다 쉽게 관객과 마주할 수 있는 공연을 추가하기도 했다.

 

 

“여우락은 한국음악, 즉 우리 음악의 이편과 저편을 모두 끌어안았다.

음악인을 불러 모아 서로 어울리도록 기획하고 조율함으로써 돌연변이와 같은 변종이 태어날 수 있게 자극했다.

분명 누군가는 눈이 맞았고, 사랑에 빠졌으며, 계속 만나게 될 것이었다.”
- 서정민갑, 2017년 리뷰, 「미르」 2017년 9월호 -

 

2013
새롭지 않으면 여우락이 아니다

그간 섭외의 묘를 발휘하던 여우락이 기획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낸 해가 2013년이다. 당시 여우락 기획팀은 모든 참가팀에게 든든한 지원 약속과 함께 여우락만을 위한 신작 공연을 주문했고, 개인과 그룹들은 새 지음知音을 찾아 그에 걸맞은 새로운 무대를 선보였다.


2012년에 이어 양방언이 예술감독을 맡았다. 7월 3일 황병기의 가야금, 양방언의 월드뮤직, 배병우의 사진 작품이 함께한 ‘동양의 풍경’으로 막을 열었다. 27일에 막을 내린 ‘조율’은 국립국악관현악단·한영애·양방언이 함께했다. 푸리·정가악회·The 林(그림)·공명·김정희·앙상블 시나위·김수철 등의 공연이 연일 올랐다. 당시 기획을 맡았던 차경연은 “여우락을 계기로 한국음악의 힘과 매력을 알게 돼 애정이 생겼다”라며 여우락이 대중에게 우리 음악의 퓨전과 크로스오버에 관심을 갖게 했다고 말했다. 유료 객석 점유율 100퍼센트. 한국음악을 기반으로 한 축제 중 이례적인 티켓 판매 수치였다. 취향에 따라 여러 공연을 합리적인 가격에 관람할 수 있는 패키지 티켓도 반응이 좋았다.


원일·한승석·김웅식·장재효·정재일·민영치가 함께하며 2000년대를 달궜던 그룹 푸리가 여우락을 통해 모습을 다시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홍보팀이던 이서정은 “푸리가 국악계의 원조 아이돌이라는 것을 확인한 시간이었으며, 2013년에 더욱 높아진 인지도는 2014·2015년 여우락 홍보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관객에게 다가가는 방식에도 ‘기획력’이 더해진 해였다. 2011년에 시작된 무료 야외 공연도 이어졌고, 무대에 오른 음악가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인 ‘여우톡talk-여기, 우리 음악 토크가 있다’도 마련됐다. 체험형 프로그램인 ‘상상톡톡! 소리공장소’ ‘에코 악기 만들기’ ‘나만의 에코백 만들기’에도 관객이 몰렸다. 여우락 대학생 워크숍이 시작되기도 했다. 당시 학생이던 안지선은 “학창 시절부터 국악을 전공하며 체득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발판을 만드는 계기였다”라고 말했다. 

 

“수평적 지평에서 만나 이종의 음악을 일구는 현장. 음악가들이 만나 펼치는 생산-방법론의 실험실이자 격전지였으며,

그것이 한국음악의 미래적 창작론을 결정짓는 모종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 송현민, 2018년 리뷰, 「미르」 2018년 9월호 -

 

2014
대중의 시선을 끌다

“2014년부터 여우락은 대중음악계로부터도 호기심과 주목의 대상이 됐습니다. 사실 국악은 대중음악 관계자들이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장르인데, DJ소울스케이프·윤석철 등의 뮤지션들이 함께하니 신선과 파격 그 자체였죠. 대중음악계의 기존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김학선)


여우락이 5주년을 맞았다. 양방언·두번째달·고래야·DJ소울스케이프·세컨세션·윤석철·강태환·서영도·한승석·정재일·강은일·이희문·장영규 등이 “여우락뿐만 아니라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한 시간”(오지원)이었다. 김학선 평론가의 말처럼, 2014년에는 보다 넓은 장르에서 관객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여우락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수치인 11,088명의 관객이 여우락을 보기 위해 극장에 방문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2010년 시작부터 대미를 장식한 잼 콘서트는 여우락의 전매특허가 돼가고 있었다. 그 공법(컬래버레이션)이 10개의 공연에 적용됐다. “여러 음악가의 모임은 곧 여러 장르의 모임이었어요. 그 접점과 균형을 찾느라 기획회의는 늘 끝장토론 분위기였죠.”(오지원)

회의가 끝나도 음악가들의 흥분은 가시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여우락이 본인들의 음악 세계에 큰 역할을 했다”(안지선)라고 했으며, 해체 위기에 처한 팀도 여우락에서 다른 팀과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재생과 부활의 기회”(오지원)를 갖기도 했다.

이 시기 많은 음악가와 축제는 되풀이되는 기획과 공연에 지쳐 있었고, 여우락은 여기에 일침을 가하며 또 다른 혁명의 뇌관을 터뜨렸다.

 

  ★  2013~2018년 '여우별(여우락 서포터즈) 티셔츠'

 

2015
호불호의 갈림길에서 모색한 한국음악

“2015년은 여우락이 그동안 구축해온 브랜드에,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이 예술감독을 맡으며 인지도가 정점을 찍은 해였습니다.”(이서정)
대외적으로는 나윤선과 재즈, 그리고 여우락의 만남으로 비쳤다. 하지만 대중음악부터 아방가르드한 음향 실험까지 두루 갖춘 시간이었다. 나윤선이 허윤정의 거문고와 만났고, 이상은의 노래 사이로 국악기의 음색이 흘렀다. 선우정아는 음향과 음악을 오가는 실험을 했고, 정재국·원장현과 같은 명인들이 국악의 뿌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해외 음악가들이 합류해 여우락의 국제화를 모색하기도 했다. 뉴엔 레(기타)와 바라지, 스테판 에두아르(타악)와 숨[suːm](피리·가야금), 죠슬렝 미에니엘(플루트)과 이아람(대금), 이로 란탈라(피아노)와 정은혜(소리)가 그 역할을 맡았다.

 

 

기대와 호응이 높았던 만큼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다. “대중음악이나 재즈에서는 애호하는 예술가의 변신을 기대하는가 하면, 단독 공연으로 그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나고 싶어 한 관객도 있었습니다.”(김학선)


특히 해외 음악가와 함께한 무대는 기대만큼 아쉬움이 많았다. “외국 음악가들의 경우 제작진이 아티스트에 대해 공부하며 그 인지도를 노출했지만”(이서정) “국경을 넘는 소통의 한계와 부딪치며 진행했기 때문에 기대했던 만큼 완성도가 나오지 않기도”(안지선) 했다. 하지만 시행착오는 여우락 실험 보고서에 좋은 경험으로 남게 됐다.


유연한 자세로 여러 음악을 넘나드는 음악가뿐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가가 국악과 꾀하는 변신이 궁금해 여우락에 들렀다가 한국음악의 묘미에 눈뜨는 이들 역시 이해의 또 다른 수확이었다.

 

2016
여우락이라는 사관학교

“여우락을 진행하면서 여우락은 이러해야 한다는 정의를 내리거나, 여우락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 강박했어요. 하지만 2015년을 계기로 이러한 강박에서 조금은 벗어나게 됐고, 관객에게 조금은 편하게 다가가도 되겠다 생각을 했죠.”(오지원)


2016년, 여우락은 그동안 팽팽하게 당긴 힘줄을 느슨하게 내려놓는다. 이해는 당시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이사장이던 손혜리가 제작 총감독을 맡았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공연의 판을 짜던 그녀는 그동안 실험과 새로움으로 향하던 여우락표 컬래버레이션에 대중성을 가미했다. 클래식 음악·대중음악·재즈·영화·드라마 등 관객으로 하여금 ‘골라 보는 재미’가 있도록 라인업을 세웠다. 한결 낮아진 문턱으로 수많은 대중의 시선과 관심을 끈 것이다. 하지만 “대중적 인지도를 지닌 음악가들을 한층 더 높은 차원에서 실험과 생산의 장으로 안내했어야 했다”라는 아쉬움에는 그간의 제작자와 목격자들이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어요. 여우락에서의 협업을 계기로 또 다른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죠. 이해에 인기를 모았던 이희문과 프렐류드의 ‘한국남자’가 적합한 예가 되지 않을까요.”(차경연)

 


여우락이 주목하는 차세대 음악가들로 구성된 ‘피어나’ 공연은 기존에 볼 수 없는 라인업이었다. 신진에 속하는 김희영·예술동인 카인·리브투더·고영열·유지숙 프로젝트·이즘이 함께했다. “여우락을 맡는 기획자에게 가장 큰 난제는 새로운 예술가들을 발굴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음악의 비전을 제시할 만한 차세대 신진 예술가들의 무대를 선보였다는 점이 2016년만의 큰 특징이 아닐까 합니다.”(안지선) 어느새 여우락은 음악가의 이력에 일종의 보증서 같은 존재가 됐고, 여우락이 하나의 ‘사관학교’와도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2017
국악과 인디음악의 교차로

2017년에는 국악을 넘어 영화와 무용, 인디 신까지 폭넓게 활약하는 원일이 예술감독을 맡았다. 그리고 타악 그룹 공명과 드러머 한웅원이 음악감독으로 원일의 기획에 실행력을 더했다.


원 감독은 자신의 음악 여정과 경험을 여우락의 여러 갈래에 녹였다. “원일 감독은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재직(2012~2015) 때부터 여우락의 오랜 동반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여우락 정신’을 아티스트들에게 잘 새겨줬어요.”(차경연)


민속음악에 젖줄을 댄 바라지부터 국악계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밴드 단편선과 선원들, 노선택과 소울소스 등이 만나며 넓은 스펙트럼을 형성했다. 잠비나이·마더바이브·선우정아·강이채·두번째달·씽씽·무토MUTO·신현필·블랙스트링 등 다양한 음악을 추구하는 이들이 15개의 무대를 의미 있게 수놓았다. “그건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원일 특유의 음악 만들기”(우다슬)였으며, “손혜리·나윤선 전 감독과는 다른 원일 감독 특유의 스펙트럼”(안지선)이었다.

 

 

 

“역대 여우락 중 국악과 거리가 먼 이들이 가장 많이 참여한 해였습니다. 저 역시 부지런히 드나들며 대중음악계의 동료들을 가장 많이 만났고, 여우락에 참여한 이후 단편선과 선원들·노선택과 소울소스 등의 음악적 차원과 급이 올라갔단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여우락에서 얻은 기운으로 좋은 작업들을 진전시키고 있어요.”(김학선) DJ소울스케이프·윤석철 등이 참가한 2014년 이후로 대중음악 전문가와 관객으로부터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

 
예술감독 역시 여우락에 진입한 이상 다른 음악가들과 함께하는 선수가 된다. 원일이 직접 연주자로 참여한 ‘장단 DNA-김용배적 감각’은 ‘여우락 DNA와 감각’을 보여준 개막작이자 이해의 화제작이 됐다.

 

2018
여기, 충성 관객이 있다!

조금은 특별한 사건으로 2018년을 회고해보자. 여우락은 “충성 관객들로 가득 찬 장”(안지선)이 됐다. “관객을 대상으로 이해 여우락 공연을 모두 관람할 경우, 선물을 증정하는 도장 깨기 이벤트를 했어요.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관객이 미션을 수행해서 놀랐죠.”(차경연)


2018년, 여우락은 한국음악의 역사를 돌아보는 의미 있는 라인업부터 대중적 노선과 실험적 보행이 균형의 접점을 잘 찾았다. 1993년 안숙선 명창이 당대 명인들과 함께한 공연부터 오늘날 창작 음악의 불씨가 된 그룹 상상과 바람곶, 그리고 오늘과 미래를 책임질 잠비나이·이아람·김택수 등이 참여해 11개의 공연을 선보였다. “2017년에 원일 감독이 우리 음악으로 실험실을 차렸다면, 2018년에는 관객의 수요를 명확히 파악해 접점을 찾았어요.”(안지선)

 

 

“여우락은 관객뿐만 아니라 음악가에게도 영감을 주는 축제가 된 것 같아요. 국악이 아닌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하든 여우락에 아티스트로 참여하면 자신의 음악적 위치를 가늠하고, 한국음악과 연결되는 통로와 출구를 찾게 되거든요. 예술감독의 방향 설정과 관객의 반응 역시 그들에게 큰 영감이 됩니다.”(차경연)


10여 년의 역사를 꾸려온 여우락은 음악의 지형도뿐 아니라 관객과 감상의 지도도 바꿔놓았다. 원일이 올린 개막 공연 ‘홀림’은 2017년 개막작 ‘장단DNA-김용배적 감각’의 또 다른 버전이었다. 사물놀이의 변신과 동시대적 변용을 목도했던 김학선은 이 공연에 대해 “그 어떤 헤비메탈 음악보다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런 체험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여우락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  2016~2018년 '여우락 페스티벌' 굿즈

 

 

2019
22세기의 한국음악을 향하는 여우락

이제 필자가 말할 차례인 것 같다. 필자가 여우락과 처음 만난 것은 2011년. 상기한 대로 한국음악이 무서운 속도로 컬래버레이션 작업에 뛰어들던 때였다. 작곡가의 음악이 입력된 악보를 받아, 연주로 출력만 하던 연주자들 사이에서는 직접 무대를 연출하고 곡을 구성하는 행위가 한창 물오르던 때였다. 여우락은 이러한 이들의 실험실과도 같았다.


실험에는 보고서가 남는다. 오늘날 여우락이 쌓은 그 보고서와 기록은 방대하다. 그 시간 속에서 어떤 음악가나 그룹은 흥하다 못해 국악 그룹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하는가 하면, 길이 기억됐으면 했던 만남이 여러 이유에 의해 뒤안길로 사라지기도 했다.


필자는 운이 좋아 여우락 대학생 워크숍의 강의를 맡기도 했고, 예술가들과 대화를 나누는 여우톡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그때마다 미래 음악가들의 눈빛을 살펴봤다. 그들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라는 여우락의 슬로건을 살짝 틀어 그 눈빛을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여기에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이 있어요’라고. 이러한 여우락의 역사가 공회전으로만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올해는 여우락이 10주년을 맞는 해다. 해마다 수십 개의 무대를 선보이던 여우락이 10주년임에도 불구하고 준비한 무대는 4개뿐이다. 기존과 달리 예술감독도 없다. 축소된 듯해 주위에선 아쉬운 소리도 들려온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여우락을 거쳐 간 음악가들이 이른바 ‘여우락 정신’을 퍼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여우락’이라는 말을 직접 내세우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선보이는 파격의 내면에는 여우락의 경험과 충격이 녹아 있다. “예술은 경험과 체험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체험을 통해 예술가와 관객은 세계관이 확장됩니다. 여우락은 제작과 열띤 모객을 통해 이러한 체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라는 김학선의 말에 십분 공감한다. 이러한 체험의 수혜자들이 공연장과 축제로 퍼져, ‘여우락적 충격’의 발현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우락이 10주년을 맞는 지금, 사실 이 기록은 여우락이라는 한국음악 창작 진영의 부분일 뿐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음악이 걷고 있는 창작 진영을 대변하는 전체이기도 하다. 그만큼 여우락의 시간은 우리에게 소중한 실험의 시간이다.

 

송현민 음악평론가. 음악을 듣고 글을 쓰며 부지런히 객석과 책상을 오가고 있다. 급변하는 음악 생태계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 미래를 ‘기획’하는 자료가 된다는 믿음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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