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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7월호 Vol.354

민중의 열망으로 새로운 세상을 쓰다

삶과 노래 사이┃변학도를 통해 다시 읽는 '춘향전'

억울하게도 변학도가 미움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춘향의 행복을 바라는 민중의 간절한 마음 때문이다.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던 억울함
한 남자가 있다. 부족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열심히 산다. 과거에 급제하고, 이런저런 노력 끝에 지방이긴 해도 명성 있는 조그만 고을에 부임한다. 관료 생활을 하면서 배운 대로, 또 매뉴얼대로, 떠나는 사또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대로 관청 장부와 대조해가며 고을의 국가 재산과 살림을 빠짐없이 철저히 점검한다. 그런데 그 착실함이 독이 됐다. 처음엔 어딜 가든 있는 이유 없는 모함과 질시라고만 생각했다. 탐욕스러운 지방관이라고 몰아세우는 사람들은 늘 있고, 또 무슨 일이든 하다 보면 사소한 오해가 생기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넘겼다. 하지만 느닷없이 나타난 감찰관리가 그를 탐관오리(貪官汚吏)라며 봉고파직(封庫罷職) 시켜버리지 않는가. 그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감찰관과 고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주위의 동료 관리들까지 모두 똘똘 뭉쳐 그를 추잡하고 파렴치한 족속으로 몰아붙였다. 그렇게 악명을 얻었다. 지워지지 않는 불우한 낙인이 찍혔다. 그의 이름은 바로 변학도다. 맞다, ‘춘향전’의 남원부사 변학도 말이다.

 


 

사실 ‘춘향전’ 이야기만 보면 변학도의 잘못은 없다. 조선시대 현실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억울하기 짝이 없다. 물론 변학도가 탐학무도(貪虐無道)한 짓을 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암행어사 이몽룡이 징치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짚어보면 그가 매도당한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춘향을 탐했기 때문이다.


“뭔 소리여! 지방관이란 작자가 남원에 내려오자마자 한 짓이 기생점고(妓生點考) 같은 것인데, 그게 제대로 된 거여?”
이런 날 선 비난은 우리 정서에 맞기는 하지만, 온당한 비판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 기생점고는 꼭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누구든 신임으로 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지방관의 업무’였다. 인수인계한 신임 관리는 지역 현안, 추진 사업, 민심 동향 등은 물론이고, 병장기를 비롯한 각종 기물, 소속 인력, 관청 살림살이까지 빠짐없이 꼼꼼히 점검해야 한다. 그 당연한 확인 절차에 관기(官妓)들도 포함된다. 관청에 소속된 기생들의 점검은 필수다.


“그렇다 해도 춘향이는 관기가 아니잖아? 오라 가라 하는 게 옳단 말이야?”
물론 춘향은 관기가 아니다. 하지만 지방관이 부르면 냉큼 달려가야만 한다. 신분제 사회였던 그 시대에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춘향은 천민賤民이었다. 아버지의 신분에 상관없이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從母法)이 시행되는 조선 시대이니, 기생 모친의 신분을 따라 천민이 된다. 계급사회의 정점에 선 양반이, 그것도 한 마을의 관장인 사또가 부르면 누구든 가야 한다. 양반도 그러한데, 하물며 평민도 아닌 천민은 말할 것도 없다. 계급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 우리에게는 괴이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춘향을 데려오라는 변학도의 명령은 이상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거였다.


결국 불려나온 춘향이는 변학도와 실랑이를 벌인다. 정확하게는 억지를 부리는 춘향과 기가 막혀 하는 변학도 사이의 악다구니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춘향은 “소녀가 비록 천한 몸이오나, 어려서부터 예법은 알아…”라고 말하며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연신 늘어놓고 지방관인 사또의 수청(守廳)을 거절한다. “지아비가 있으니 수청을 못 하겠다”라는 춘향의 말은 변학도에겐 망발의 정점이다. 변학도 입장에선 속에서 천불이 날 소리다. 예법은 양반 부녀자의 것이지 기생 딸의 것은 아니다. 또한 아무리 예법을 안다 한들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전임 사또의 자제와 혼인한 관계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공식적으로 혼인한 적도 없고 첩으로 받아들여진 적도 없다. 단지 춘향이 혼자 지아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설령 춘향이 이몽룡의 첩이었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이곳저곳 다니며 한두 번 함께 지낸 첩은 한둘이 아니었고, 하룻밤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첩으로 받아들인다는 약조를 골백번 해도 마찬가지다.


간혹 춘향이처럼 양반의 수청을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과연 양반들이 순순히 물러났을까. 저항하는 즉시 불호령이 떨어지는 냉정한 계급사회에 그런 일은 없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 기생의 딸이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는 건 무척 놀라운 일이다. 변학도 입장에선 춘향의 항거를 지방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따라서 춘향을 감옥에 가둔 것이다. 그에겐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내가 아니어도, 너라도 제발!”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춘향전’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이몽룡이 과거에 급제하자마자 암행어사가 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왕명을 받아 민정을 시찰하는 암행어사를 생판 초짜 관리에게 시키지 않는다. 4~5년 정도 훈련된 관리에게나 어사를 제수하는데, 그걸 이몽룡은 곧장 받는다. 게다가 자신의 연고지를 피해야 하는 상피제(相避制)가 있어 남원 지방 암행어사가 절대 될 수 없음에도 이몽룡은 어사가 돼 남원으로 내려온다. 그러고는 춘향을 콕 찍어 구해낸다. 관료로서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정인(情人)만을 구출해낸다. 나아가 임금은 춘향을 크게 표창해서 첩이 아닌 처(妻)가 되게 하고 심지어 정렬부인(貞烈夫人) 직첩까지 내린다.


바로 이런 현실성 없는 설정의 연속에 ‘춘향전’의 혁명성이 담겨 있다. ‘춘향전’이 고전 중에 고전인 이유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그 누구도 묻지 않은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데 있다. 그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고, ‘춘향전’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진지한 대답을 한다.


변학도에게 저항하며 수청을 거절하는 춘향의 모습이 다소 황당한 설정임을 당시 사람들은 모르지 않았다. 더불어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는 것도, 남원에 내려와 춘향을 구출해내는 것도, 그리고 정렬부인으로 삼는 것도 당시 현실과 맞지 않는 전개란 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판타지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비록 자신은 질곡에 묶여 있지만, 부디 춘향만은 벗어나 훨훨 날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춘향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도련님이 떠난 후 그녀에게 연일 시련이 닥쳤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변학도의 수청을 승낙할 수도 있지만, 변학도가 간 다음은 어떻게 될까. 아마 또 다른 사람들이 찾아와 같은 일을 반복하며 이러한 상황을 끝없이 이어갈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어떻게 될까. 그녀다움은 어디로 가버릴까.


그랬다. 춘향은 이 황망한 상황에 문제를 제기했다. 계속 저항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억지를 부리며 바락바락 대들어야만 겨우 제자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랬다. 춘향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알았다. 그렇게 버티는 안쓰러움을 눈물 어린 눈으로 보았다. 그래서 ‘춘향전’이라는 판타지를 만들어냈다. 고귀한 양반 도령께서 암행어사가 돼 춘향을 구출하러 내려올 리도 없지만, 하늘이 두 쪽 나도 춘향은 절대 정렬부인이 될 수 없지만, 그렇게 되기를 열망했기 때문이다. 남원 사람들 모두 춘향이 감옥에서 고생할 때 같이 애달파했고 슬퍼했고 통곡했다. 춘향이 한양으로 올라가자 자기 일인 것처럼 신이 나서 기뻐했다. 춘향이처럼 자신도 잘될 거라는 희망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한마음이었다. 그녀가 잘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비록 나는 아니어도 너만은 행복하게 살아라’는 열망, 그것이 ‘춘향전’이다. 그리고 ‘춘향전’을 읽고 전하는 사람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춘향전’에 담긴 혁명성의 본질이다.
 
유광수 연세대학교에서 고전 문학을 공부한 후, 우리 고전의 현재적 적용과 계승을 위해 교육·방송·출판 등 다방면에서 노력하고 있다.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림 미르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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