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런 창극은 없었다. 이것은 창극인가 뮤지컬인가.” 영화 ‘극한직업’의 대사를 패러디한다면 이런 광고 문구도 가능할 듯싶다. 2014년부터 한 해도 빼놓지 않고 매년 막을 올려온 국립창극단의 ‘변 강쇠 점 찍고 옹녀’ 얘기다. 이 스테디셀러 창극의 성공 요인은 도대체 뭘까?
고선웅
1999년, “왜 내가 63빌딩 16층 저 안쪽 중간 자리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어야 하나” 고민하던 회사원 고선웅은 사표를 던지고 연극판에 뛰어들었다. 그 후로 15년이 지난 2014년은 그가 연극계에서 확고부동한 ‘문제아’로 집중 조명받는 시기였다. 연극 ‘푸르른 날에’와 ‘칼로 막베스’가 거듭 공연됐고, 낭떠러지처럼 급전직하하는 아찔한 엘레지와 헛웃음이 나오는 썰렁한 유머가 기막히게 배합된 연출로 관객을 들었다 놨다 했다. 누군가는 그를 ‘원작 비틀기의 고수’라 했다. 젊은 연출가의 시각으로 새로운 ‘변강쇠전’을 만들어야겠다는 국립창극단이 주목한 것이 바로 고선웅이었다.
변강쇠전
우리에게 ‘변강쇠전’은 엄청나게 외설적인 내용이라고 소문만 들어서알 뿐, 정작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 드문 고전소설로 통한다. 더러 고우영 만화나 이대근 주연 영화를 본 사람들 빼고는 사실상 통 모르는 작품이다. 판소리 여섯 바탕에 포함됐던 ‘변강쇠타령’은, 아뿔싸 실전失傳됐다. 뭘 가지고 작품을 만들려는 건가? 하지만 반대로 이것은, 오히려 새로운 창작의 열정이 싹틀 수 있는 빈 도화지 구실을 하게 된다.
청각적 외설
고 연출은 초연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시각보다는 오디오가 야한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랬다. 배우들은 벗지도 않았고 조명은 별로 야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남녀 주인공 변강쇠와 옹녀가 만나는 장면에 그 ‘야함’이 집중된다. 북으로 가던 변강쇠와 남으로 가던 옹녀는 하필이면 좁은 길에서 양쪽으로 지나가다 몸이 ‘딱’ 걸린다. 옹녀가 “무 엇이 다리 사이에 걸렸소”라고 하면 변강쇠가 “거, 참 고이헌 형편일세.
내 양수양족은 내 마음대로 허드락도 안 되는 것이 꼭 하나가 있습디 다”라고 받는다. 야하다고? 서울에서든 파리에서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허리를 젖혀가며 웃느라고 정신없었다.
생명력
글로만 읽으면 좀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만 공연장 분위기는 다르다. 이건 야한 장면을 몰래 보는 관음적 쾌락과는 거리가 멀다. 고선웅은 “‘변강쇠전’을 천천히 들여다보니 외설적이긴 해도 격조 있는 작품”이라고 했다. “성행위를 과장하는 게 아니라 성적인 것을 삶의 밑천으로 승화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사랑이었다. 요즘 같은 말초적인 사랑과는 달리 휴머니티도 있었다.” 그렇다. 그 ‘외설’이란 바로 ‘생명 력’이었고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주제와 직결된다. 팔자가 드세 만나는 서방마다 상을 치러야 했던 옹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새로운 삶이다. “공경하는 시어미에 사서삼경 꽤나 읽고 / 사지 아니 오지 튼튼한 사내 만나 / 창천처럼 떠받들고 떡개고리 같은 장군 낳고 / 공작처럼 딸아 키우고 사는 게 꿈이어든만.” 결혼해서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소박하고 보편적인 소망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시시하다고? 2018년 기준 1인 가구가 579만 가구에 달한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옹녀
그렇게 넘치는 생명력과 열망은 작품의 주인공을 남성 변강쇠에서 여성 옹녀로 바꿨다. 성性 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를 열성적으로 살아가는 여인, 봉건사회에서 남성 지배층에 반발하는 저항과 반전反轉 의 여인으로 옹녀가 재해석된 것이다. 열악한 현실을 딛고 일어서려는 옹녀에게선 성적인 요소조차 삶의 밑천으로 승화된다. 옹녀가 ‘남으로 떠나자’ 고 결심하는 노래에서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이 실존적 결단이 잘나타나 있다. “오냐 옹녀, 오냐 옹녀, 오냐 옹녀 / 가자 가자 어서 가자 / 내 기필코 인생 역전하여 보란듯이 사리라 / 어드메서 나를 알아 사랑 하실 우리 님이 삼삼하니 나타날세라.” 이렇게 씩씩하고도 당찬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창극을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
제2막
2014년 초연 기자간담회에서 작품 계획이 발표되고, 당시 필자가 걱정한 것이 바로 ‘2막’이다. 고 연출 역시 같은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무슨 얘긴고 하니, 우리 고전소설이나 판소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뒷 부분 늘어지기’에 대한 염려였다. 대표적인 예가 ‘흥부가’와 ‘적벽가’ 의 뒷부분이다. ‘흥부가’에서 놀부가 박타는 장면이나 ‘적벽가’에서 조조가 화용도로 도망가는 장면은 판본에 따라 전체의 절반에 달하기도 한다. 뒷부분의 사설이 하염없이 늘어지기 때문에 작품의 밀도가 어그러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데, ‘변강쇠전’에선 변강쇠가 죽은 뒤옹녀가 그의 시체를 처리하는 장면이 너무 길다. 이대로 가면 맥이 풀리지 않을까? 그러나 고 연출은 그 부분을 ‘고선웅식 각색’으로 힘줬 다. “옹녀는 이미 너무나 많은 사내의 초상을 치렀다. 선택권이 없는 그녀가 이제는 이판사판, 공격적인 인물로 바뀌는 것으로 그렸다. 변강쇠에게 병을 준 장승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나서는 것이다!”
과연, 힘이 넘치는 2막은 원작과는 달리 옹녀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해피엔딩으로 완전히 바뀌게 된다.
한승석
그런 연출의 의도를 제대로 살린 사람이 작창과 작곡, 음악감독을 맡은 한승석이다. 그는 ‘변강쇠 점 찍고 옹녀’가 나올 무렵 음악가 정재일과 함께 월드뮤직 프로젝트 앨범을 발표해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재즈 & 크로스오버 음반 부문을 수상했다. 한마디로 장르를 넘나들며 음악을 주무르는 달인이라는 얘기다. 얼마 되지 않는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자 중 한 명이라는 한승석은 고선웅과 합숙하며 토씨 하나, 장면 하나에 심혈을 기울여 음악을 만들어냈다. 판소리·민요·정가·비나리·가요, 심지어 카를 오르프의 클래식 음악 ‘카르미나 부라나’까지 가져와 장면마다 ‘딱 들어맞는 음악’을 축조했다. 흥이 오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뮤지컬을 닮은 젊은 창극
힘 있는 캐릭터와 극본, 군무, 빠르고 역동적인 연출, 변화무쌍한 음악. 이쯤 되면 떠오르는 공연 장르가 있다. 뮤지컬이다. 사실 누가 봐도 ‘변 강쇠 점 찍고 옹녀’의 초연은 뮤지컬을 연상케 할 정도의 색다른 행보를 보여줬다. 보통 3~5일 공연하던 창극의 관행을 깨고 무려 26일에 달하는 장기 공연을 했고, 캐스팅 일정표를 예매 사이트에 올렸는가 하면, 로비엔 그날 출연하는 배우들의 사진을 크게 걸어놨다. 결과는 ‘만 원사례’. 공연 불황기에 이룬 국립창극단의 쾌거였다. 극장을 나오면서 젊은 관객들이 과연 뭐라고 하는지 귀 기울여봤다. “뮤지컬보다 낫지 않아?” “얼씨구 소리가 그냥 막 나오더라.” 한 뮤지컬 제작자는 “장면 전환이나 템포, 구성에서 나무랄 데가 없었다”라고 혀를 내둘렀다.
나중에 ‘차범석희곡상’ 뮤지컬 극본 부문 상을 받게 됐다는 필자의 전언을 들은 고 연출은 처음엔 “네? 아, 아니, 그건 창극인데요!”라며 깜짝 놀라더니, 며칠 뒤에는 여유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 가만 생각해보니 창법만 다를 뿐이지 대사를 노래로 한다는 점에서 뮤지 컬하고 똑같네요, 하하하.”
세계성
2016년 4월, 프랑스 파리의 한복판 ‘테아트르 드 라 빌’에서 ‘변강쇠 점찍고 옹녀’의 막이 올랐다. 놀랍게도 마지막 장면에서 천여 명의 청중이 일제히 국악 장단에 맞춰 박수를 쳤고, 커튼콜을 마치고도 환호가 그치지 않아 막을 또 올려야 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하던 필자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진짜로 궁금해 관객들을 붙잡고 물어봤다. “전혀 알지 못하던 매력적인 세계에 빠졌다. 노래하는 목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다.”(라파엘 주네) “성 性 과 유머가 음란하지 않고 재미있게 섞였다. 첨단 테크놀로지 이미지만 갖고 있던 한국에 이런 문화가 있는줄 몰랐다.”(외제나 카라라) 여기에 더해 에마뉘엘 드마르시 모타 극장 장은 “유서 깊은 프랑스 문학 장르에서도 코믹함과 섹슈얼리티가 이렇게 조화를 이루는 작품은 드물다”라고까지 했다. 첫 공연 뒤 고 연출은 퐁피두센터 근처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캄캄한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어서 눈물이 난다. 우리 이야기도 세계 공용어가 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기분이 좋아진 기자들이 숙소로 돌아오다 광장에서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1막 마지막 노래를 합창한 기억이 난다. “원 데이 모어 One Day More!”
이번에는 새로운 변화도 더해진다. 농익은 연기력으로 변강쇠와 옹녀 그 자체이던 최호성·이소연과 함께 새로운 주역으로 유태평양·김주리가 가세한다. 원색의 색감을 활용한 세련된 무대 비주얼로 시각적으로도 무장했다. 이미 본 사람들도 한 번 더 볼만한 무대다.
글 유석재 조선일보 여론독자부 기자. 1990년대 초부터 공연 마니아로서 대학로를 들락거렸 고, 2014년부터 3년간 공연 담당 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다시 초야의 관객으로 돌아와 종종 공연장에 출몰한다.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날짜 2019년 8월 30일~9월 8일
장소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관람료 R석 5만 원, S석 3만 5천 원, A석 2만 원
문의 국립극장 02-2280-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