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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9월호 Vol.356

탄탄히 판을 변주하는 배우의 힘

SPECIALㅣ 이소연과 최호성, 유태평양과 김주리

 

 

모든 게 생방송인 무대에서, 배우는 현장 분위기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존재다. 앞으로 펼쳐질 아홉 번의 공연 동안 아홉 번 모두 다른 웃음과 감동을 안겨줄 4인 4색 배우. 그들을 만나봤다.

 

 


공연은 ‘살아 있는 생물’이다. 이런 수식의 상당 부분은 배우에게 빚진다. 창극은 창자 홀로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판소리를 기반으로 하는 장르이기에 더욱 그렇다. 국립창극단의 ‘변강쇠 점 찍고 옹녀’가 대표적인 보기다. 외설로 치부되던 ‘변강쇠타령’을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탈바꿈시킨 극본·연출의 고선웅, 원전의 소리와 민요·가요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흥을 자극한 작창·작곡의 한승석 등 창작진의 역량도 탁월하지만 극과 캐릭터에 생명력을 부여한 배우들의 공도 상당하다. 그 덕에 올해도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살아 숨 쉰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가 2019-2020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개막작으로 관객을 다시 만난다. 2014년 초연 이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공연했다. 이번 시즌의 가장 특기할 만한 점 역시 ‘배우’에 있다. 초연부터 5년간 호흡을 맞춰온 옹녀 역 이소연과 변강쇠 역 최호성은 여전히 터줏대감이다. 유태평양이 새로운 변강쇠로 등판하고, 떠오르는 20대 소리꾼 김주리가 객원으로 옹녀 역에 캐스팅 돼, 몸과 목을 풀고 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8월 초에 만난 이소연과 최호성은, 찜통 같은 날씨에 지칠 법도 한데 옹녀와 변강쇠를 다시 만난다는 설렘에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판소리 다섯 바탕에 들지 않은 극이 6년 연속 올라가는 것은 이례적이잖아요. 공연이 단기에 끝나버리면 농익은 모습을 보이기 쉽지 않은데, 재공연을 여러 차례 하다 보니 여유가 생기고 그 안에서 좀 더 성숙한 연기를 선보일 수 있어 좋아요.”(이소연) “공연이 올라갈 때마다 늘 즐겁죠, 한결같이 행복해요. 관객들이 찾아주셔서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성적인 것을 불편하지 않고 유쾌하게 다룬 것이 매력이죠. 1~2년 차 때 영상은 제가 봐도 부끄러워요. 지금은 많이 성숙했죠. 하하.”(최호성) 유태평양은 2016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뒤 같은 해에 이 작품을 네 번이나 봤다고 했다. 재밌어서였다. 요즘 수염도 기르고 있다는 그는 “주변 친구들이 ‘그냥 원래 네 모습대로 연기해라’고 한다”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진짜 어른들을 위한 창극, 함께 어른이 돼가는 배우
변강쇠와 옹녀가 서로의 ‘중요 부위’를 바라보며 노래하는 ‘기물가己物歌’ 등 공연 내내 야릇함이 이어지는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18금 창극’이다. 하지만 이 등급을 수긍해야 하는 속살은 따로 있다. 작품 속에서 병자호란·임진왜란까지 겹치면서 백성의 삶은 말 그대로 팍팍하다. 색色은 이런 생에서 백성의 유일한 유희였다. 건강한 성은 삶을 꾸려나가는 원동력이었다. 변강쇠는 건강한 삶과 건강한 유희를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떡방아를 찧었다. 남편이 죽게끔 돼 있는 살煞인 상부살喪夫煞로 앞서 수많은 남편을 잃은 옹녀에게 사지, 아니 그것을 더해 오지가 튼튼한 변강쇠는 천생배필이다. 이런 삶의 지난함과 야속한 운명을 파릇파릇한 아이들이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작품 관람에 삶에 대한 이해가 동반돼야 한다면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28금 이상’이 돼야 한다. 변강쇠가 아닌 옹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는데 그녀는 팔자가 드센 여자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힘든 운명을 개척하며 사랑을 지키기 위해 당차게 살아가는 여인으로 그려진다. ‘변강쇠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옹녀의 시대를 연다’는 의미를 담은 제목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관람 뒤에 머리가 아닌 마음에 와닿는다. 이 작품은 초연한 해에 창극 최초로 ‘차범석희곡상’ 뮤지컬 극본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소연은 옹녀를 연기하면 할수록, 더 깊이 이해된다고 했다. 초연 때만 해도 미혼이었던 그녀는 작품 속에서 성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 낯설고 부끄럽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지금은 표현 방법이 농익었을 뿐 아니라 술, 노름에 빠져 있는 변강쇠를 다그치고 타박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며 깔깔거렸다. 최호성은 이 작품이 ‘슬프게 느껴지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옹녀 대사 중에 ‘송장 치르기, 신물이 난다’는 말이 있어요. 얼마나 가슴에 한이 쌓였으면 그랬겠어요. 변강쇠가 술, 노름을 좋아함에도 ‘나를 사랑하니까’ ‘내 팔자니까’라며 버티는데 그것이 너무 슬프고 처연하게 다가오더라고요”라고 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이소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변강쇠와 석굴에서 만나 함께 살자고 절을 하는데, 처음에는 그냥 의식으로만 여겼어요. 그런데 해를 거듭할수록 ‘앞으로 삶이 평탄했으면 좋겠다’는 옹녀의 마음이 절실하게 느껴지더라고요”라고 말했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가 몸이 아닌 마음의 연륜을 근거로 한 ‘어른들을 위한 창극’인 이유다.

 

발칙한 창극, 호기로운 배우
이제 막 변강쇠와 옹녀를 마주하게 된 20대 동갑내기 소리꾼들은 어떨까. 더구나 두 사람은 외국물 좀 먹은 소리꾼이다. 유태평양은 10대 시절 아버지의 권유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유학을 떠나 제3세계 타악을 공부했고, 김주리는 말레이시아 헬프 대학교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나이는 어려도 탄탄한 내공의 소유자답게 캐릭터 해석력도 만만치 않다. 창극 ‘오르페오전’ ‘심청가’ 등에서 주역을 맡아 타고난 끼와 실력을 뽐낸 유태평양은 변강쇠에게서 외로움을, 뮤지컬 ‘서편제’의 이벤트 오디션에서 76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작곡가 윤일상과 작업하기도 한 김주리는 옹녀에게서 현대성을 발견했다. “처음에 변강쇠를 한량으로만 봤어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채워지지 않은 외로움 같은 것이 있더라고요. 저 역시 겉보기에는 쾌활하고,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지만 내면에는 외로움을 많이 느껴요. 그런 모습을 투영했죠.”(유태평양) 11세에 9시간 20분간 판소리를 연창하며 최연소·최장 시간 노래 기네스 기록을 세운 김주리는 오디션 당시 이 대본을 보고 감동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해온 옹녀가 판소리를 위해 길을 걸어온 저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 인물로 여겨졌다”라고 말했다. “옹녀는 열정도 있고 도전 정신도 갖고 있죠. 그녀를 그리는 시대 배경은 과거지만, 현시대 결에 맞는 여성상과 사회적 이슈를 대입할 수 있다고 봐요. 옹녀 캐릭터에 맞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내고 싶어요.”(김주리)

 

 

 

 

 

이들이라 가능하다. 4인 4색, 옹녀와 변강쇠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로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2016년 유럽 현대 공연의 중심이라 평가받는 프랑스 파리의 테아트르 드 라 빌에 창극 최초로 공식 초청받기도 했다. 당시 무대에 오른 이소연은 “처음에는 걱정했지만 상부살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객석에서 웃음이 터지는 것을 보고, 한국 관객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생각에 안심했다”라고 돌아봤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많은 면에서 창극의 신기록을 세워왔다. 2014년 초연 당시 창극 최초 18금·26일 최장기간 공연한 데 이어 서울·여수·울산·안동 등 국내 11개 도시를 비롯해 파리까지 총 88회 공연으로 관객 4만1,365명과 만났다. 최호성은 10주년 공연까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흡족해했다. 이소연은 “음역 중 최고 음이 굉장히 높아서 오래 못 할 거 같아요. 옹녀가 무대에 많이 등장하니 역시 부담이 돼요”라면서도 덕분에 도전하는 방법을 깨우쳐나가고 있다고 자평했다. 두 노련한 소리꾼은 새로운 캐스트에 대해 반겼다. 최호성은 “유태평양은 워낙 신동이라 제 걱정을 해야지 태평양 걱정은 하지 않는다”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다들 퇴근하는데 두 사람은 늦은 시간까지 남아서 연습하고 가요. 젊은데 노련하고 책임감까지 갖췄다”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소연은 “호성 씨와 둘이 너무 잘 알기도 하고 몇 년째 같은 공연을 해서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는데 새로운 캐스트로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라면서 “자극도 되고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느끼며 긴장감도 가질 수 있어 더 재미있을 것 같다”라고 기대했다.
반면 젊은 피들에게는 부담이다. 유태평양은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선배님들의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고 호흡도 잘 맞아 저희 입장에서는 부담이 없잖아 있다”라고 고백했다. “어중간하게 하게 되면 정말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옹녀, 변강쇠 외에 배우들과도 기존에 맞춰온 호흡이 있어, 저희 것만 내세울 수는 없어요.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저희 것을 구체화해야죠.” 객원인 김주리는 부담이 더하고, 생각도 더 많다. 다만 16년 전인 2003년 ‘국악계 신동’ 자격으로 국립창극단의 어린이 창극 ‘춘향이와 몽룡이의 사랑이야기’에 출연하며 국립창극단 배우들과 호흡을 맞춘 적이 있어 창극단 분위기가 마냥 낯선 건 아니다. 그녀는 “국립극장에 오니까 또 다른 설렘이 찾아와요. 최고의 끼와 기량을 갖춘 소리꾼 선배님이 계신 공간에서, 대표 작품인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함께 하게 됐는데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강조했다.
경지에 이른 작가들과 배우들은 작품 속 인물을 본인이 창조했음에도, 종종 자신들의 의지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범인凡人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한다. 노력의 산물이지만 그것이 의지대로 만들어지지는 않음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네 명의 소리 배우에게 옹녀, 변강쇠에게 각각 건네고 싶은 말을 물었다.

“변강쇠야, 정신 차리고 술 많이 먹지 말고 마누라 말 잘 들어라. 네가 가진 복 중 가장 좋은 중요한 복이 처복이다.”(최호성) “(극 중 대사인) 너는 네 인생 살아라.”(이소연) “변강쇠야 기다려라. 이제 내가 너에게 들어가려고 한다.”(유태평양) “옹녀야 네 인생 살아라. 옹녀답게 옹녀 인생을 즐겨라.”(김주리)

 

이재훈 뉴시스 문화부 기자. 2008년 11월 뉴시스에 입사해 사회부를 거쳐 문화부에 있다. 무대에 오르는 건 뭐든지 듣고 보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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