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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9월호 Vol.356

고전으로 비춰본 현재의 명암

VIEW 프리뷰 3┃국립극장 NT Live 리어왕·디 오디언스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을 잃고 비극적인 여생을 보낸 리어왕과 여러 차례의 접견을 통해 정치를 읽는 눈을 기른 엘리자베스 여왕. 그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 두 편의 공연은 과거의 서사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시간까지 널리 비춘다.

 

 

 

무너진 세계에서 처연히 끝을 마주하는 ‘리어왕’
‘리어왕’은 치체스터 페스티벌 시어터에서 공연된 프로덕션을 런던의 듀크 오브 요크 극장 무대에 다시 올린 버전이다. 치체스터 페스티벌 시어터는 300석 규모로, 과장을 보태면 무대와 객석 간의 거리를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일체감 가득한 공간이다(듀크 오브 요크 극장은 원래 500석 규모이나, 300석에 맞춰 객석을 정비해 ‘리어왕’을 올렸다). 리어왕 역의 배우 이언 매켈런은 관객과 같은 방 안에 머물며 말을 거는 느낌으로 연기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모든 관객과 눈을 마주치고, 모든 관객이 배우의 눈을 볼 수 있도록. 연출을 맡은 조너선 먼비의 해석에 따르면 ‘리어왕’은 아버지와 딸 사이의 대화이며, 나아가 자매 혹은 형제 간, 친구들 사이의 대화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무대에 오르던 시기 리어왕과 이언 매켈런은 여든 살로 같은 나이였다. 여든 살이 된 인간이 정신의 혼란을 겪기 시작할 때, 그는 어떤 경험을 하고 그의 주변 세계는 어떻게 반응하는지의 문제를 ‘리어왕’은 예민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이언 매켈런은 이런 리어왕의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자신의 부모, 혹은 조부모를 떠올릴 테고 누군가는 도널드 트럼프를 떠올릴 것이라고 했다. 이언 매켈런이 리어왕을 연기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 어쩌면 이것이 그의 마지막 셰익스피어 연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리어왕에게는 세 딸이 있다. 첫째와 둘째는 아첨으로 큰 재산을 받아내지만 셋째 딸인 코딜리아는 아부의 말 대신 진심 어린 사랑의 말만을 전하고, 그 결과로 추방당한다. 이후 리어는 두 딸로부터 무참히 버림받는다. 프랑스 왕의 아내가 된 코딜리아는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영국으로 향한다. 가장 사랑하던 막내딸이 아부의

말을 하지 않자 추방해버리는 노쇠하고 고집 센 남자. 그런 리어왕은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이 완전히 멀어 있는 듯하다. 조너선 먼비의 ‘리어왕’은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동시에 바람 앞의 촛불처럼 사위어가는 한 인간에 집중하게 만드는 극이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배우의 힘이리라. 처음 등장하는 순간부터 반쯤 혼이 빠져나간 듯한 모습인 이언 매켈런. 그는 노인성 치매의 모든 징후를 보인다. 갑자기 분노 발작을 일으키는가 하면 많은 순간 기억이 온전치 않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버림받은 아버지가 된다.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지, 그의 감정의 격동을 따라가면서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이 놀람과 슬픔을 낳는다. 또한 그 자신이 착란을 인지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노쇠한 인간의 연약함을 남긴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리어왕’은 늙어가는 두 아버지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명은 리어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신하 글로스터다. 두 사람은 자신들을 사랑하는 자녀를 믿지 못하고 거부한다. 그리고 결국 그로 인한 파국으로 여생을 마감한다(그들은 자녀들의 비극 역시 막지 못한다). 글로스터가 실명하는 1막 후반부의 연출은 공포영화를 보는 듯한 날 선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1막 후반부 20분은 무대를 폭력이 지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먼 글로스터가 이제 광인이 돼버린 리어와 마주친 순간 주군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때 느끼는 비애는 또 어떠한가. 리어가 착란 속에서 글로스터와 나란히 앉았을 때, 그 둘의 한없이 어긋난 대화는 글로스터의 오열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비극은 정해진 수순을 밟아나간다. 400여 년 전 탄생한 고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했다는 점만 봐도 ‘리어왕’이,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왜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지 알 수 있다. 리어왕이 현대적 병상에 눕기까지, 한 인간이 추락하는 과정을 보는 일은 고통스러우며, 결국 그 모든 것의 끝에 남는 것은 그저 허무함과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잘 일깨우기는 어려우리라.

 

 

 

 

반세기의 시간을 대화를 통해 오가는 ‘디 오디언스’
‘디 오디언스’는 2013년 2월 15일 런던 웨스트엔드 길구드 극장에서 초연됐다. 희곡을 쓴 피터 모건은 2008년 ‘텔레그래프’가 선정한 ‘영국 문화계의 영향력 있는 100인’ 중 28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 영국을 대표하는 극작가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크라운’의 제작자이기도 하며, ‘프로스트 VS 닉슨’(2008)을 비롯한 영화 시나리오 작업도 지속해왔다. 그중 ‘디 오디언스’와 관련한 영화 이력이 있는데, 2006년에 개봉한 영화 ‘더 퀸’이다. ‘더 퀸’은 1952년 즉위한 이래 60년이 넘도록 왕좌를 지키고 있는 엘리자베스 2세가 주인공인 영화로,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의 죽음 직후 국가적인 애도 열기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려 한 엘리자베스 2세의 시간을 그려낸 작품이다.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에서 ‘더 퀸’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헬렌 미렌이며, 연극 ‘디 오디언스’는 피터 모건과 헬렌 미렌이 다시 만난 무대다. 연출은 영화 ‘빌리 엘리어트’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스티븐 달드리가 맡았다.
‘디 오디언스’라는 제목부터 간단히 설명해야 할 듯하다.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2세. 디 오디언스는 엘리자베스 2세가 집권하는 동안 매주 총리와 주 1회 행하는 비밀 접견을 일컫는 말이다. 매주 화요일 6시 30분경, 총리는 여왕을 비공식적으로 방문한다. 법적으로 의무화된 것은 아니지만, 정치 현안에 대해 여왕이 꾸준히 새로운 정보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조치다. 비밀 접견은 버킹엄궁전 1층에 있는 사적인 알현실에서 진행된다. 작품이 시작되면 집사와 같은 인물이 나와 이 전통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가 알현실을 설명하며, 중앙에 있는 두 개의 의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문제의 의자들이 무대 중앙에 놓인다. 프랑수아 에르베가 만들고 1826년부터 버킹엄궁에 있었던 이 의자들은 원래 쿠션 부분이 버건디색이었는데, 메리 여왕이 더 낙관적인 인상을 주는 노란 실크로 바꿨다고 한다.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거야?’라는 생각이 스칠 때, 관객석에서 웃음소리가 터진다. ‘디 오디언스’는 정치 드라마인 동시에 정치 풍자극이다. 영국인에게는 분명한 ‘캐릭터’로 기억되는 총리들이 연달아 등장한다. 긴 통치 기간이 갖는 힘이 이런 것이리라. 처음에는 토니 블레어와 백발의 엘리자베스 2세가 노란 실크 의자에 앉아 대화하고, 그다음에는 윈스턴 처칠과 젊은 엘리자베스 2세가 등장한다.
‘디 오디언스’는 여왕과 의회가 정치적 난제를 어떻게 돌파하는지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해 보여준다. 실제로는 ‘디 오디언스’에서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무대 위의 대화는 전부 상상하고 연출한 것이다. 하지만 이 안에 ‘인간’ 엘리자베스 2세와 ‘통치자’ 엘리자베스 2세의 약함과 권위가 모두 들어 있으며, 시대에 따라 다른 쪽 의자에 앉는 총리들은 때로 여왕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때로 여왕에게 단호한 충고를 한다. 시간이 되면 총리는 정중히 인사하고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여왕은 혼자 남는다. ‘디 오디언스’는 중간 중간 소녀이던 때의 엘리자베스를 보여준다.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 조지 6세는 원래 왕위에 오를 사람이 아니었다. 조지 5세가 숨을 거둔 뒤, 서열에 따라 에드워드 8세가 즉위했는데, 그는 연인인 심슨 부인이 이혼한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결혼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왕위를 포기했다. 그래서 에드워드 8세의 동생인 앨버트 왕자가 조지 6세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드리워지는 영국에서, 국민을 단합하게 할 연설을 해야 했던 그는 말더듬을 고치기 위해 고군분투했는데, 그 과정을 그린 영화가 바로 ‘킹스 스피치’다. 엘리자베스도 그렇게 아버지를 따라 갑자기 버킹엄궁전으로 이사해야 했다. “여기는 박물관 같아요! 예전에는 이웃도 있었는데!”라고 한탄하는 소녀의 목소리가 알현실 뒤편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질 때, 성인이 된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공감하며 듣고 있다. 하지만 추억에 휩싸이기에는 그다음 화요일 접견이 빠르게 돌아온다. 그런 반복을 통해 여왕은 더 능숙하게 정치적 제스처를 갖춰간다. 헬렌 미렌은 의상과 머리색을 바꿔 나이를 다르게 표현하는데, 외견보다도 말투와 대화의 내용, 대화를 끌어가는 방식을 통해 반세기의 시간을 오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시간’을 연기하는 듯 감동을 준다. 마지막 장면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키는 강렬함이 있다.

 

이다혜 북칼럼니스트. ‘씨네21’ 기자. 책 칼럼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를 연재하고 있다.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를 펴냈다.

 

NT Live ‘리어왕’ ‘디 오디언스’
날짜 2019년 9월 19~22일, 28일 | 2019년 9월 26~29일
장소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관람료 전석 2만 원
관람연령 만 12세 관람가
문의 국립극장 02-2280-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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