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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호 Vol.358

그렇게 명곡은 탄생해왔다

SPECIALㅣ국악 관현악 이야기

 

국악 관현악이 세상에 등장했을 때, 전통의 새로운 발명에 국악계는 출렁였다. 무수한 사건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음악으로 발전해온 국악 관현악을 마주해본다.

 

1960년대, 서양 관현악을 참조한 국악 관현악의 등장은 국악계 안팎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후 국악 관현악 편제의 직업 악단이 속속 창단되기 시작했고, 지난한 성장통을 겪으며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국악 관현악은 대중에게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음악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생각에도 변화가 찾아오는 듯하다. 어느새 알게 모르게 생활 속 깊숙이 들어와 텔레비전 광고에서도 국악 관현악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친근해졌다.
지금도 진화 중인 국악 관현악의 역사를 큰 흐름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은 정체성 회복과 앞으로의 방향성 모색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다. 국악 관현악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시대별로 키워드를 뽑아 이야기해보려 한다.

 

태동하다
한국 전통음악에서는 연주자가 직접 주도적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거나, 공동 창작으로 만든 음악을 긴 시간을 두고 다듬어 완성하는 방법을 사용했기에, 연주자가 곧 작곡가였다. 작곡과 연주의 분업은 1940년대에 시작됐고, 창작 국악이라고 구별해서 불렀다. 국악계에서 ‘국악 관현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기록은 1939년에 김기수가 작곡한 ‘황하만년지곡’이 처음이고, 최초의 국악관현악단은 1965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이라는 이름으로 창단한 현現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이다. 당시는 ‘관현악’이라는 개념이 한국음악에 어떻게 적용돼야 하는지, 밑그림조차 구상하지 못하던 시기다.
작곡가와 연주자가 분리되고 악보가 매개체가 돼 창작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는 대략 광복 이후이며, 특히 196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국악 만들기 작업이 활발해졌다. 하지만 국악 이론가들은 김기수에 의해 독점되던 1940~50년대를 창작 국악의 태동기로 분류한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창작 국악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국립국악원 주최 ‘신국악작품공모’를 통해 신세대 국악 작곡가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들의 작품은 서양음악의 작곡 형식을 차용한 음악이거나, 전통음악의 선율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한편 독일 유학 중이던 윤이상은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1966년 한국 궁중음악 어법으로 작곡한 ‘예악’을 발표해 크게 주목받았다. 유럽에서 활동하던 그의 성공은 한국적 이디엄Idiom의 창작 승화로서 중요한 의미로 평가되며, 새로운 작곡 경향으로 정착하는 계기가 됐다.

 

확산되다
1970년대는 신진 작곡가들에 의해 다양한 작품이 만들어지며 양적인 확산이 급격히 이루어진 시기다. 실험적인, 혹은 새것이라는 명분으로 예술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시대로 전환했는데,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대한민국작곡상’ 제도다. 1978년에 이상규의 ‘대바람 소리’와 황의종의 ‘승무’가, 1979년에 이해식의 ‘해동신곡’과 김정길의 ‘추초문’이, 1980년에 전인평의 관현악 조곡 2번 ‘두레’가 ‘대한민국작곡상’을 수상했고, 일련의 수상작들은 오늘날까지도 주요 무대에서 자주 연주되는 명곡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탐구하다
1980년대는 ‘진정한 의미의 창작 국악곡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국악 관현악곡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관심이 집중된 시기다. 그 결과 ‘전통음악의 양식적 흐름을 계승하되 현대에 맞는 예술성 있는 작품’이라는 데에 합일점을 찾기도 했다. 한편 국립국악원 신축 청사 개관과 KBS 국악관현악단 출범, 그리고 중앙국악관현악단의 활발한 활동으로 새로운 국악 관현악곡이 다수 작곡됐다.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에서 선보인 박범훈의 음악을 비롯해 국립국악원의 ‘한국음악창작발표회’와 서울시국악관현악단, KBS 국악관현악단에서, 그리고 대학교 정기 연주회에서도 문제성 있는 작품이 초연됐다. 1987년 초연된 이건용 작곡의 ‘만수산 드렁칡’(황지우의 시와 국악과 독창, 합창이 어우러진 작품)은 서울대학교에서 연주돼 학생들에게 상당한 공감을 일으켰다. 중앙국악관현악단과 김덕수패 사물놀이의 협연으로 초연된 박범훈의 ‘신모듬’, 김영동의 ‘매굿’을 비롯해 이성천 ‘나의 조국’ 등 국악 관현악 명곡이 대부분이 이 시기에 작곡됐다. 국악 관현악의 폭넓은 음향과 독주 악기의 섬세함을 동시에 표출할 수 있는 협주곡이 대량으로 작곡·연주됐다.

 

변화하다
1990년대는 창작 국악의 다변화 시대다. 국악계에는 아시아음악의 바람이 불어왔고, 박범훈은 한·중·일 아시아 민족 악기를 한곳에 모아 ‘오케스트라 아시아’를 창단했다. 그로 인해 주변 국가의 다양한 음악이 교류됐으며, 악기의 혼합 편성도 자연스럽게 시도됐다. 한편 ‘대한민국국악제’에서는 종교음악으로서 굿 음악의 공연화 가능성을 엿보며, 무속을 주제로 한 곡들이 발표됐다. 1995년 국립국악관현악단과 1996년 경기도립국악단이 창단하며 예술성을 겸비한 국악 관현악곡이 양산됐다. 이 시기 주목받은 작품으로는 이해식의 ‘젊은이를 위한 춤-바람의 말’과 원일의 ‘신뱃놀이’를 들 수 있다. 이해식의 작품은 토속성과 현대성이 결합된 국악 관현악곡으로 의미와 음악적 재미까지 실현해낸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원일의 작품은 민요 ‘뱃놀이’를 관현악화한 작품으로 이국적 타악기의 사용과 전통 장단을 다양하게 변주해가는 점에서 신선함이 돋보인다. 이 두 작품은 선율과 리듬의 전개에서 전통음악적인 면모와 대중음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 젊은 연주자들 사이에 많은 인기를 누렸다.

 

넘나들다
2000년대의 창작 국악은 ‘국제적인 음악으로의 도약’이라는 말로 대변된다. 마치 르네상스를 맞은 것처럼 다양하고 독창적인 시도가 거리낌 없이 펼쳐졌는데, 탈脫장르의 실험적 시도를 비롯해, 한국이라는 지역적인 장소를 벗어나 외국에서도 연주되며, 한국음악이 세계음악으로 더 넓은 곳에서 인정받는 중요한 시기로 기록된다. 2007년 황병기 예술감독 재임 시절 국립국악관현악단이 기획한 대규모 프로젝트 국가브랜드 공연 ‘네줄기 강물이 바다로 흐르네’는 최근 국악계에서 최대 화제가 된 공연이다. 당시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네 명의 작곡가 김영동·나효신·박범훈·박영희에게 각각 한국인의 정서를 표현하는 종교인 불교·기독교·무교·도교를 소재로 2년간의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작곡을 위촉했다.
2010년 10월 국립극장 해오름 무대에서 연주된 2시간 분량의 국악칸타타 ‘어부사시사’도 언론의 주목을 받은 대작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위촉으로 탄생한 임준희의 ‘어부사시사’는 17세기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에 곡을 붙여 21세기 우리 소리로 재현해낸 작품이다. 독창·실내악·중창·합창·관현악 등 다양한 편성의 칸타타 형식으로 출연진만 130여 명인 대규모 작품이다. 2011년에는 한국계 독일인 작곡가 정일련에게 위촉한 ‘파트 오브 네이처’를 초연했다. 현대음악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독일에서 수학하고 국악기 연주에도 정통한 작곡가 정일련이 작품 전체를 맡아 ‘자연 속의 인간’ 이야기를 새로운 음악 형식으로 풀어냈다. 국악기의 새로운 연주 기법을 도입해 창작 국악 관현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네줄기 강물이 바다로 흐르네’, 국악칸타타 ‘어부사시사’ ‘파트 오브 네이처’ 등 대범하고 통 큰 기획은 창작 국악의 역사에 한 획을 그으며 전설적인 업적으로 남았다. 이러한 기획은 아마도 전무후무한 일로 기억될 것이다.


국악 관현악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니, 작곡가는 사회가 아직 생각하지 않은 기조, 혹은 구체화되지 않은 철학을 만드는 사람인 듯싶다. 현재의 한국음악은 무수한 사건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지금의 음악으로 변이됐을 것이고, 작곡가는 매번 새로운 음악 문화를 만드는 최첨단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결국 국악관현악단의 미래는 작곡가의 몫이다. 혜안을 겸비한 작곡가들을 부지런히 찾아내는 것이 우선이다.


현경채 음악평론가, 영남대학교 겸임교수. 대학에서 국악 작곡을 전공했으며, 국악 창작곡이 초연되는 자리에 함께하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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