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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호 Vol.358

창극의 새 증명

VIEW 프리뷰 1-1┃국립창극단 패왕별희

 

지루할 틈 없이 눈과 귀를 채워주는 현대화된 고전은 세계화의 길을 찾는 창극의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했다.

 

 


지난 4월 초연 당시 전석 매진을 기록한 창극 ‘패왕별희’가 호평에 힘입어 반년 만에 재공연한다. 창극의 ‘소리’와 경극의 ‘몸짓’을 결합한 실험적인 작품은 대만 당대전기극장 대표 우싱궈가 연출을 맡고, 소리꾼 이자람이 작창과 공동작곡, 음악감독을 맡았다.
동명의 경극을 재해석한 ‘패왕별희’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초한전쟁이 배경이다. 초나라의 영웅 항우는 유방과의 해하 전투에서 패장敗將의 수모를 겪는다. 연인인 우희는 항우에게 강동에서 재기하라는 마음을 전하며 자결하고, 항우는 유방의 군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오강에서 배를 타고 강 너머로 피신하려던 그는 나룻배가 작아 말과 사람이 다 탈 수 없자 사공에게 애마 오추마만 태우고 가라고 재촉한다. 그러자 충직한 말은 주인의 마음을 읽은 듯 강물에 뛰어든다. 이를 본 항우는 “오추마는 나를 위해 몸을 던져 죽었고, 우희는 사랑으로 자결하여 그 절개 영원히 남겼네/ 세상을 뒤덮을 영웅이라지만, 오강에 홀로 남았으니 어찌할 수 있을까/ 멀리 웅장한 산하를 보니 내세를 기약함이 낫겠구나”라고 절규하며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는다.
창극 ‘패왕별희’는 이렇듯 한 시대를 호령한 영웅이 몰락하고 연인과 안타까운 이별을 하는 과정을 일곱 개의 장으로 압축해 보여준다. 공연이 시작되면 도창 역할인 맹인 노파가 등장해 전쟁의 고통을 설명한다. 그러곤 어린 항우에게 ‘강가(오강)의 전설’을 들려준다. 영웅 항우를 둘러싼 이야기다. 2장 ‘홍문연’에선 항우가 대인배다운 성품 탓에 유방을 죽일 기회를 놓치는 일화가 나온다. 중국 역사를 잘 모르는 한국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한 내용으로, 항우와 유방의 책사들이 ‘판소리 배틀’을 하듯 지략을 겨룬다. 4장 ‘십면매복’과 5장 ‘사면초가’에선 중국 역사상 위대한 전투 중 하나인 초한전쟁이 벌어진다. 영화라면 수많은 배우나 컴퓨터그래픽스로 나타냈을 대규모 전투 장면의 규모와 기세가 ‘패왕별희’에서는 배우 등 뒤에 꽂힌 깃발의 수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경극은 ‘4’라는 숫자가 ‘많다’를 뜻한다. 깃발 4개와 6개를 각각 등 뒤에 지닌 한신과 항우, 이외에도 깃발을 등에 꽂거나 손에 든 배우들이 무대 좌우를 뛰어다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전쟁을 의미한다. ‘패왕별희’는 여기에 영상과 북소리로 박진감을 더한다. 한국 관객이 보기에도 전쟁의 긴장감이 모자라지 않다. ‘패왕별희’는 중국 역사 이야기이나 탄탄한 짜임새에 현대 감각의 무대와 영상, 배우들의 정교한 몸놀림과 깊이 있는 소리까지 더해져 지루할 틈이 없다. 창극과 경극의 특징을 영리하게 가져온 덕분이다.
창극은 소리로 온 세상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판소리의 창과 아니리, 국악기 합주로 만드는 음악 중심의 청각적인 경험이 중요하다. 판소리 ‘적벽가’를 기본 레퍼런스로 삼은 구성진 판소리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호소력 있게 전달하며 비장미를 높이고, “시방, 지금 뭐 하는 것이여?” 등 우리 말맛이 살아나는 대사는 유머를 더한다. 반면, 경극은 배우의 손끝 하나로 온 세상을 표현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걸음걸이나 손동작 하나하나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만큼 시각적이고 매우 구체적이다. 경극 특유의 화려한 의상을 갖춘 배우들은 양어깨를 쫙 펴고 걸으며 손과 발을 따로 놀린다. 항우의 기개가 늠름한 발걸음에서, 우희의 야리야리함이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식이다. 창극과 경극의 표현법이 서로 달라 초연 전에는 두 전통이 물과 기름처럼 동동 뜨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양국 제작자들이 균형을 잘 잡은 덕에 거북하지 않고 신선한 작품이 탄생했다.

 

 

 

현재를 관통하는 오래된 것들의 힘
우싱궈를 비롯한 대만 경극 전문가들은 작품의 외형인 극본·안무·의상 등을 맡았다. 경극 배우이자 연출가인 우싱궈는 ‘리어왕’ ‘템페스트’ 등 서양 고전을 경극 양식으로 풀어낸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의상디자인을 맡은 예진텐은 영화 ‘와호장룡’으로 아카데미 미술상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권력과 지위를 나타내는 깃털 장식, 금박이 수놓인 붉은빛의 옷 등 중국 전통 경극 의상의 상징성을 살리되 창극에 맞춰 더 가볍고 활동성 있는 의상을 선보였다.
소리를 맡은 음악감독 이자람은 창극 ‘억척가’ ‘사천가’ 등을 비롯해 판소리를 기반으로 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며 연기까지 선보이는 재주꾼이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적벽가’를 중심으로 판소리 다섯바탕을 참고한 작창과 작곡으로 작품의 내면을 채웠다. 영웅·전쟁·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노랫말로 잘 표현해내면서 전쟁의 잔인함과 무상함을 국악기 연주로 잘 빚어낸다.
쉽지 않은 경극 연기를 자연스럽게 선보인 배우들도 빛이 난다. 항우 역의 정보권은 장수의 기개와 패장의 슬픔을 묵직하게 보여주고, 우희 역을 맡아 여장을 한 김준수는 고난도 검무까지 매끄럽게 소화한다.
‘패왕별희’는 서서히 잊혀가는 전통의 외연을 어떻게 넓히면 좋을지 알려주는 좋은 사례다. 지루할 틈 없이 눈과 귀를 채워주는 현대화된 고전은 세계화의 길을 찾는 창극의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확인하게 했다. 그동안 국립창극단은 ‘트로이의 여인들’ ‘우주소리’ ‘시’ 등의 작품에서 그리스 고전·SF 소설·시 등을 다양하게 접목하며 창극의 활로를 찾아왔다. 주로 여성이 두각을 나타내는 작품이 많았는데 강인한 남성을 앞세워 힘 있는 울림을 들려준다는 점에서 색다르기도 하다.
작품을 만든 우싱궈와 이자람은 전통예술의 현대화 작업을 꾸준히 시도해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초연을 앞두고 지난 3월에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두 사람은 작업을 하면 할수록 서로의 전통에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 우싱궈는 “판소리에는 한민족 특유의 용감함과 생명력이 담겨 있고, 경극에는 손짓과 표정 같은 여러 퍼포먼스 요소가 내재한다. 판소리의 청각적 감동이 경극을 거쳐 외적으로 표현됐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두 전통이 서로 시너지를 내 새길을 개척해나가길 바란다는 의미였다. 이자람 역시 “우싱궈 연출과 나의 공통점은 각자의 전통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과 존경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면서 새로운 시도에 설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전통을 현대화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 우싱궈는 “전통적인 요소가 침전물처럼 쌓이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작품 내적으로는 현재와 공명하고 있는 주제 의식도 눈여겨볼 만하다. 전쟁에서 패했음에도 중국에서 여전히 영웅으로 추앙받는 항우의 모습은 현대인에게 올바른 삶의 방식을 고민하게 한다. 우싱궈는 “패한 사람은 그저 패장으로 남기 마련이지만, 항우만큼은 달랐다”라며 “그가 가진 강직함과 정직함, 가슴속에 품은 따뜻한 사랑을 강조하고 싶다”라고 했다. “항우는 유방에게 패했지만, 사마천은 그를 ‘사기’의 ‘제왕’ 편에 수록했고 지금도 중국에선 그를 영웅으로 받들어요. 이를 통해 참된 승리, 진정한 영웅의 의미를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극본과 안무를 맡은 린슈웨이 역시 2000년 전 중국의 역사 이야기지만 ‘패왕별희’가 이 시대 한국 관객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시대가 바뀌어도 인류 내면에 있는 사랑은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에요. 작품에 등장하는 오강이라는 추상적인 강을 두고 단절된 두 세계는 남한과 북한, 또는 중국과 대만을 상징하기도 하죠. 이처럼 공간의 단절이 있어도 그 사이에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사랑이 있다는 것을 관객에게 전하고 싶어요.”

 
김미영 한겨레신문 기자. 한겨레가 만드는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쓴다. “알고자 하는 자는 용기를 가져라”라는 계몽주의 표어처럼 전진해야 할 때 두려워하지 않는 기자가 되려고 노력한다.

 

국립창극단 ‘패왕별희’
날짜 2019년 11월 9~17일
장소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관람료 R석 5만 원, S석 3만 5천 원, A석 2만 원
문의 국립극장 02-2280-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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