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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호 Vol.358

전기수가 떴다!

삶과 노래 사이┃조선의 이야기꾼 ‘전기수’

 

조선 시대 ‘길거리 선생님’이자 ‘인기 연예인’이었던 전기수. 그는 낭독을 통해 민중에게 넓은 견문과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최근 영화나 드라마에서 책비가 등장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영화 ‘궁합’에서는 송화옹주가 책비로 신분을 속이고 부마를 보러 가고, 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에서는 구해령이 책비로 변신해 어느 양반집 안채에서 여인들을 모아놓고 소설을 읽어준다.
하지만 아쉽게도 조선 시대엔 그러한 ‘책 읽어주는 여자’라는 뜻의 책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책비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와 있지 않은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조선 시대에도 책을 잘 읽는 여자들은 있었지만, 책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며 하나의 직업으로 삼은 여자는 없었다.
대신 조선시대 민간에서 전기수가 활발히 활동했다. 전기수란, 말 그대로 ‘기이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노인’이란 뜻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다리 밑이나 시장·활터·약국·담배 가게·사랑방 등에서 돈을 받고 재미있는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말한다. 인기 있고 유명한 전기수는 여성들의 공간인 규방에도 불려가 지체 높은 안방마님 앞에서 소설을 낭독하기도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책비는 전기수의 모습을 현대 작가들이 살짝 변형해 허구적으로 만들어낸 인물인 듯하다.

 

 

청중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요전법’
영조 때 한 전기수는 열 살부터 얼굴에 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렸고,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처럼 한글을 익혔다고 한다. 그는 특히 소설을 잘 읽었는데, 그 목소리조차 꼭 여자와 같았다. 어느 날 홀연히 집을 나갔는데 어느 누구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후 그는 여자로 변장한 채 사대부가에 출입해 진맥을 볼 줄 안다고 하거나, 방물장수라고 속인 뒤 부녀자들에게 소설을 읽어줬다. 사대부 부녀자들은 너나없이 그를 좋아하고, 때로는 부적절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판서 장붕익이 이를 알고 전기수의 입을 막고자 몰래 살인을 저질렀다. 만약 그가 입을 열면 난처한 일들이 벌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전기수가 책 읽어주는 모습은 조선 후기 문인 조수삼의 ‘추재기이秋齋紀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기수는 동대문 밖에 살고 있었다. 한글로 된 소설을 잘 읽었는데, ‘숙향전’ ‘소대성전’ ‘심청전’ ‘설인귀전’ 같은 것들이었다. 매달 1일은 초교(종로 6가) 아래에서, 2일은 이교(종로 5가) 아래에서, 3일은 이현(배오개) 시장에서, 4일은 교동(낙원동) 입구에서, 5일은 대사동(인사동) 입구에서, 6일은 종각(보신각) 앞에 자리 잡고 소설을 읽곤 했다. 7일부터는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하여 한 달을 마쳤다. 달이 바뀌면 전과 같이 했다. 전기수가 워낙 재미있게 소설을 읽기 때문에 사람들이 겹겹이 담을 쌓고 들었다. 그는 소설을 읽다가 가장 절정적인 대목에 이르면 갑자기 읽기를 뚝 멈췄다. 그러면 사람들은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다투어 돈을 던졌는데, 이것을 ‘요전법邀錢法’이라 했다.
‘추재기이’는 전기수의 낭독 장소와 대본, 기술 등을 구체적으로 들려준다. 당시 전기수가 얼마나 전문적으로 활동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특히 전기수는 한창 소설을 낭독하다가 절정에 이르면 별안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청중은 ‘아!’ 하고 탄식하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얼마 후 누군가 전기수 앞으로 엽전 한 닢을 던지면, 다른 사람들도 너나없이 엽전을 꺼내 던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전기수 앞에는 엽전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전기수는 비로소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소설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일컬어 ‘요전법’이라 했다.

 

 

 

홀연히 나타나 세상을 낭독하다
도대체 전기수가 어떤 방식으로 소설을 읽어줬기에,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이 앞다투어 엽전을 던졌을까. 먼저 전기수는 책을 보고 읽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모두 암기한 뒤 완벽히 소화해서 들려줬다. 책을 보지 않아도, 책을 보고 읽는 것처럼 유창하게 이야기를 술술 들려줬다고 한다. 다음으로 전기수는 리듬에 맞춰 문장을 읊었다. 청중이 지루하지 않도록 단어 사이에 가락을 넣었다. 실제로 우리나라 고전소설의 모든 문장은 리듬에 맞춰 읽도록 구성돼 있다. 이는 ‘홍길동전’의 첫 부분에서 살펴볼 수 있다.
화설, 조선국 세종시절에 한 재상이 있으되 성은 홍이요 명은 모라. 대대 명문거족으로 소년등과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매, 물망이 조야에 으뜸이요, 충효 겸비하기로 이름이 일국에 진동하더라.
전기수는 연기력이 뛰어나 다양한 표정을 짓고, 그에 어울리는 목소리로 인물을 표현했다. 또한, 손짓·발짓·몸짓 등을 통해 등장인물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기도 했다. 더불어 전기수는 소설을 읽어주며 해설을 덧붙이거나, 청중과 이야기에 관해 서로 묻고 답하며 소통하고자 했다. 마찬가지로 청중도 내용에 따라 환호와 박수·탄식·눈물 등 여러 반응을 보이며 즐거워했다. 그래서 전기수의 낭독판은 항상 왁자지껄하고 흥이 넘쳤던 것이다.
전기수의 낭독 솜씨는 몹시 대단했다. 그의 뛰어난 솜씨에 다소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심지어 낭독을 듣던 한 청중이 전기수를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18세기 정조 때 전기수가 종로의 담배 가게 앞에서 소설 ‘임경업전’을 낭독하고 있었다. 그런데 간신 김자점이 임경업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는 대목에 이르자, 청중 가운데 한 남자가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고는 담배 가게 안에서 담배 써는 칼을 들고 나와 소리쳤다.
“네가 김자점이더냐?”
그러고는 곧장 칼로 찌르니, 전기수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전기수가 소설을 너무 실감 나게 낭독한 탓에 그 남자가 전기수를 김자점으로 착각해버린 것이었다. 이 사건을 전해 들은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이런 허무맹랑한 죽음도 있으니 가소롭다!”
조선 시대 전기수는 여러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나, 규방에서 무료하게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줬다. 전기수의 활약은 조선 시대 소설의 독자층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전기수는 민중의 교육자이기도 했다. 당시 민중은 전기수의 소설 낭독을 들으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식을 습득할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따라 울고 웃으며 정서를 순화했다. 다시 말해 전기수는 일종의 ‘길거리 선생님’이자, 조선의 ‘인기 연예인’이었다.
오늘날에도 전기수가 나타나 각종 책을 낭독해주면 좋을 것 같다.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빙 둘러앉아 전기수의 실감 나는 낭독을 듣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악한 인물이 나오면 다 함께 입을 모아 힘껏 야유를 보내고, 주인공이 고난을 헤쳐나갈 때는 손뼉 치고 환호하며, 전기수가 가장 극적인 부분에서 낭독을 뚝 그쳤을 때는 ‘아!’ 하고 아쉬워하기도 하는 것을.
다행히 요즘 전문적으로 책을 읽어주는 낭독 문화가 다시금 활기를 띠고 있는 듯하다. 유튜브와 팟캐스트, 오디오북 등 수많은 낭독 콘텐츠가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다채로운 플랫폼을 통해 우리의 낭독 문화도 더욱 다양하고 풍성해지리라 본다. 혼자 독서할 때 체득할 수 없는 새로운 생각과 감정을 교류하는 장이 활짝 열리기를 바란다.

 
정창권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초빙교수. 역사 속 소외 계층인 여성·장애인·하층민 관련 책을 집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정조처럼 소통하라’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 등이 있다.
그림 김도연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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