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네비게이션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빠른예매 바로가기 사이트 지도 바로가기
월간미르 상세

2020년 01월호 Vol.360

국립극장 70년, 되돌아보다

깊이보기 하나 | 국립극장 70주년 특집

지금은 그 존재가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70년 전 국립극장이 문을 열었을 때는 아시아, 더 나아가 제3세계에서 최초였고, 그것도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지 겨우 5년, 정부 수립 2년을 맞은 가난한 우리가 당당히 관립 극장을 가졌다는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특히 국민소득 70달러 안팎의 신생 국가였던 터라 변변한 건물 하나 없어서 국립극장도 일제가 지어 쓰던 부민관에 둥지를 틀 수밖에 없었지만 정신문화를 숭상해 온 문명국가로서의 면모만은 여실히 보여준 경우이기도 했다.
1950년 1월 ‘민족예술의 발전과 연극문화의 향상을 도모하여 국제문화의 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설치한 국립극장’(대통령령 제47호, 국립극장 설치령 제1조)은 2급 촉탁의 유치진 초대 극장장이 배우 13명으로 신협이라는 전속극단을 출범시킴과 동시에 ‘원술랑’이라는 연극으로 팡파르를 울리게 된다. 당초 우리나라의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국립극장을 대구와 부산에도 설치키로 했으나 예산 부족으로 서울에만 설치된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4월에 개관 작품 ‘원술랑’에 이어서 창극 ‘만리장성’을 공연하고, 다음 달 창작오페라 ‘춘향전’과 무용 ‘인어공주’에 이어 숨 가쁘게 두 번째 연극 ‘뇌우’ 공연을 올리며 폭발적 인기를 얻게 된다. 그로 인해 36년 동안의 식민 통치와 해방 공간 5년여의 불안정과 혼란을 단번에 불식하고 무대예술이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
국립극장이 거둔 예상외의 성공은 단순히 문화예술계에 국한되지 않고 신생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순항에도 청신호를 알리는 계기까지 마련했다. 경제 여건이 열악한 상황에서 국립극장을 설립한 무리수를 상쇄시키고도 남을만한 효과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국립극장이 연극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출발 시점에 창극과 오케스트라 반주의 오페라, 그리고 무용까지 무대에 올린 것은 장차 창극단·오페라단·무용단·교향악단까지 전속으로 두겠다는 의지의 암시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6.25전쟁 발발로 국립극장은 3년 가까이 운영이 정지됐다. 1953년 2월에야 겨우 대구의 문화극장에 둥지를 틀 수 있었고, 전속단체 없이 근근이 명맥만을 잇다가 휴전과 함께 4년여 만인 1957년 여름에 환도해 명동의 시공관을 국립극장으로 삼게 됐다. 국립극장 설립 7년 만에 일본인들이 세운 건물 세 군데를 옮겨 다닌 셈이다.
어떻든 국립극장이 환도한 만큼 정부로서도 제구실을 하도록 우선 전속 극단부터 조직하게 했다. 다행히 출발 당시 전속단체이던 신협이 사설 단체가 돼 전쟁 중 피난지에서도 꾸준히 활동하다가 1953년에 환도해 있었기에 그 극단을 끌어들여 신협과 민극을 두고 환도 기념으로 ‘신앙과 고향’(1957)을 공연해 안착시킬 수 있었다.
당시 시민들과 연극계에서 국립극장에 거는 기대도 컸는데, 이유는 크게 두 가지에 있었다. 첫째 변변한 공연장이 없던 시절, 비록 일본인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가 1936년 영화관으로 지은 명치좌 건물이긴 하지만 위치와 규모 면에서 더없이 좋았고, 두 번째로는 가난한 배우들이 단원이 되면 적지만 급료를 받고 연극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환도 직후 국립극장은 이질적인 전속단체 구성으로 갈등이 있었던 데다가 수익성도 너무 떨어져 여당 의원들 일부는 폐지론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다행히 문화계의 지원을 받고 서항석 극장장의 설득으로 가라앉았으나, 원로소설가 박종화 등 문화계 인사들이 국립극장 안정을 강력히 권유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1960년대 초는 국가적·사회적으로 요동쳤고, 그에 따라 국립극장도 문교부 소관에서 공보처로 이관되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를 두는 조건을 달아 극장장은 정부 관리가 맡도록 했다. 연극 전문가의 운영 시대가 끝나고 일반 관리가 국립극장을 운영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직제를 바꾸면서 정부는 부대사업의 실천화, 국립극단의 질적 향상, 연극의 5개년 발전계획, 부설 예술단체 결성, 관객 확보 방안 등 그럴듯한 개선책을 내놓기도 했지만 대부분 구두선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공보처 2급 관리들이 극장장을 맡으면서 국립극장은 공보처의 유배지로 여겨지며, 2년 동안 다섯 번이나 책임자가 바뀌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국립극장장으로 간다 함은 곧 관리로서는 출세길이 막히는 것이라 보고 모두가 기피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렵게 조직된 전속극단만은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내외의 여망에 따라 당대 최고의 배우라 할 장민호·나옥주·옥경희·김향이 등이 집결해 ‘안네 프랑크의 일기’(1960) 등을 무대에 올려 인기를 모아가게 된다.
이 시기 국립극단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느냐의 문제에 당면했는데, 마침 아서 밀러 등의 극작가와 엘리아 카잔 같은 연출가가 지배하던 미국 브로드웨이 연극을 시찰하고 온 중진 연출가 이해랑의 조언으로 안정적인 극단 운영과 리얼리즘을 기조로 한 전문 연극을 해야 한다는 지향점을 찾게 됐다. 바로 이것이 국립극장이 주류 연극의 산실로 자리 잡는 배경이 됐다.
이러한 국립극단의 입장은 1960년 실험극장을 시작으로 생겨난 민중극단·동인극장·자유극장·여인극장·광장·산하 등 이른바 동인제同人制 시스템 극단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하유상과 ‘산불’로 이목을 끌며 화려하게 등장한 신예 작가 차범석이 창작극을 주도하면서 뒤를 이은 김의경·이재현·노경식·윤조병 등에도 계승돼 초창기 유치진과는 또 다른, 전후의 새로운 리얼리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더구나 동인제 시스템 극단들의 번역극을 보면 당시 아서 밀러를 비롯해 장 아누이·막스 프리슈·프리드리히 뒤렌마트·에드워드 올비·숀 오케이시 등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이 선호됐음을 알 수 있다. 국립극장에서 연출을 담당했던 인물들, 즉 이해랑을 비롯해 박진·이원경, 무대미술을 전담하다시피 했던 김정환·장종선·최연호 등이 리얼리즘 신봉자였던 사실에서도 국립극장의 방향이 어떤 것이었지 잘 알려준다.
 앞에서도 언급한바 국립극장은 처음부터 우리나라 무대예술의 진흥이라는 큰 목표가 있었지만 전쟁 등을 거치느라 실행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행히 국립극장이 명동에 자리 잡으면서 전통문화에 조예가 깊은 오재경 공보장관의 뜻에 따라 당초의 목표대로 정부가 1962년 1월 15일에 전속단체 설치 근거(각령 제379호)를 공포하고 곧바로 국립국극단을 필두로 국립오페라단·국립무용단을 두게 됐다. 그리고 1969년에는 국립교향악단까지 두게 된다. 때마침 음악대학 출신의 공무원 김창구가 극장장을 맡았기 때문에 일이 수월하게 진행됐다.
그리하여 국립극장에는 연극인들뿐 아니라 문인·음악가·무용가·국악인 등 전국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였고, 그들의 팬까지 몰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돼갔다. 그러자 정치·경제·군사 등 모든 면에서 남북 대결을 벌이고 있던 정부는 문화도 북한에 뒤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남산 일대에 종합민족문화센터 건립을 추진케 된다. 그러니까 정부는 북한의 대형 문화 공간인 2,300석의 평양대극장(1960년 개관)이라든지 800석의 모란봉극장(1958년 개수) 등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따라서 1969년에 완공할 목적으로 1967년 10월, 장충동에 국립극장 건물 착공에 들어가면서 명동 국립극장은 매각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매각이 쉽지 않았을뿐더러 주요 활동 무대를 잃게 된 재야 공연단체들의 저항으로 정부가 진퇴양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한 실정에서 정부가 예산상의 이유로 종합민족문화센터 건립 계획을 접은 뒤 장충동의 신축 국립극장을 개관하고 1973년 10월에 ‘성웅 이순신’을 개관 공연으로 올린 후에도, 1975년까지 명동의 국립극장을 존속시킨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신축 국립극장은 국립가무단과 합창단, 그리고 발레단까지 두면서 전속단체가 8개나 있었고 예산·무대 등 여러 면에서 부작용이 발생했으며 접근성이 떨어지는 위치와 지나치게 큰 규모는 불필요하기도 했다. 8개 단체를 거느리는 대형 극장에 걸맞은 인적 구성도 해야 했으므로 운영요원 128명과 전속단원 348명에 임시직원까지 합치면 529명으로 단번에 폭증했다. 그러한 장충동 신축 극장에 대해 많은 전문가는 위치에서부터 하드웨어, 그리고 소프트웨어 등 모든 면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 같다고 우려했다.
게다가 공무원 극장장들이 계속 바뀌면서 문화의 균점화라든지 국제교류 등 새로운 포부를 열심히 밝히곤 했지만 성취되는 것은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극장장이 거의 한두 해 간격으로 계속 교체됐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정권이 바뀌고 국립극장에도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즉 제5공화국 정부는 문화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통령령 제10589호에 따라 국립극장 직제를 일부 개정해 ‘극장장을 공연분야의 전문가로 보補 할 수 있다’라고 내세우고 극장장과 공연과장을 별정직으로 만들어 민간 전문가를 영입토록 했다. 그 첫 혜택을 중견 연출가 허규가 누리게 됐다. 허규 신임 극장장은 레퍼토리 선정위원회와 운영위원회를 구성, 전속단원들의 계약제 실시, 단체장의 3년 임기제와 겸직 금지, 연출자의 독립성 보장 등 혁신책을 제시하고 의욕적으로 일을 펼쳐나가기도 했다. ‘전통연희의 현대적 계승’을 내걸고 극단 민예를 이끌어온 연출가 허규 극장장은 효율성의 극대화 등을 내세우며 대극장보다는 소극장 공연에 치중했고, 600석의 야외무대를 만들어 마당극을 하도록 했으며 창극을 대형화하고 판소리의 공연 횟수도 대폭 늘린 바 있다.
특히 장충동 이전 10주년을 맞아서는 소극장의 경우 레퍼토리 시스템을, 그리고 대극장은 교체 순환 방식을 택함으로써 상설공연 체제를 갖도록 해 국립극장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이는 국립극장의 정체를 깨뜨려보겠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이었는데, 역시 예산상의 어려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험극장의 창립 멤버였고 민예까지 운영하는 등 연출가답게 극장에 아카데미즘을 도입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이 문화 올림픽이 되는 데 국립극장이 그 전초장이 돼야 한다는 자세로 전통예술의 국내외 공연을 대폭 확대하는 면모도 보여줬다. 물론 동구권 등의 해외 단체 공연도 적잖게 유치했다. 국립극장이 오랜만에 제구실을 한 셈이다.
그런데 국립극장이 남산에 뿌리를 내리면서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내외의 여론에 따라 공연장으로서의 특장의 중요성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이 말은 곧 국립극장이 너무 많은 단체를 두고 있어서 공연장으로서의 개성이 약한 데다가 공연 횟수도 조정하기 쉽지 않고 여러 곳에 대형 극장이 세워져 있으니 전속단체의 분산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1977년부터 조금씩 전속단체의 구조 조정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그 첫 번째 단체가 가무단이었고(1976년 재개관한 세종문화회관으로 이관), 1981년에는 교향악단이 KBS로 이전됐다. 전속단체가 8개에서 6개로 감소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국립극장을 이끌어가야 하는 민간 전문가는 아무래도 행정적으로 미숙하고 힘이 부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부 내에서조차 극장장을 노련한 공무원이 맡아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허규를 끝으로 원상으로 되돌리게 되고, 그동안 국립극장에서 행정을 도맡아 했던 2급 공무원 전영동이 뒤를 잇게 됐다.
그러나 1990년 초 정부조직법 개정에 따라 문화부가 새로 발족되고 국립극장이 공보처 소속에서 벗어나면서 전영동은 1년 만에 원대 복귀했고, 외교부 경력의 윤탁이 새로 부임한다. 그는 윤선도의 후예답게 문화 감각을 갖추고 있었기에 ‘움직이는 국립극장’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좋은 창작극이 나올 수 있는 여건 조성,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교포 밀집 지역 순회공연, 지방 공연예술 발전, 청소년 및 근로자를 위한 공연 행사 증가 등을 내걸고 열정적으로 일을 벌여나갔다. 그의 공로는 단연 여러 명의 신진 극작가를 발굴한 창작극 육성 사업이었다.
그러나 공무원의 순환근무제 또는 정년제 등으로 극장장 임기가 2~3년에 머묾에 따라 장기적 사업 수행에 어려움이 있었다. 극장장이 교체될 때마다 예술감독제와 같은 발전책도 생겨났다. 예술감독제의 탄생도 실은 그 시기에 국립극장의 법인화라든지 시즌 프로덕션제, 독립채산제 등을 도입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른 것이었다. 이 시기 주목되는 부분은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국립발레단장을 맡은 중진 무용가 김혜식이 부임하며 획기적인 변화를 꾀한 점이다. 유명무실하던 오디션을 철저하게 시행했을 뿐만 아니라 발레단 후원회까지 조직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국립극장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눈에 띄게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가령 한민족예술제의 확대 실시라든지 문화광장 마련 등은 폐쇄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국립극장의 큰 변화였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이상으로 문화 정책에 일가견이 있던 김대중 정부는 문화사업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설정할 만큼 진취적이었고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는 표어를 내걸고 국립극장을 과거 영국에서 시도한 바 있는 책임운영기관으로 바꿨다. 국립극장은 극장장도 문화 전문가가 맡아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운영심의위원회를 구성, 공모에 들어갔고 1999년 11월에 연극인 김명곤을 새 극장장으로 선출했다.
김명곤이 극장장을 맡으면서 국립극장은 군살빼기에 들어갔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이미 전에도 거론된 바 있던 극장의 특장화 작업으로서 일종의 전속단체 재조정이었다. 과거에는 변변한 극장이 없었기 때문에 국립극장이 여러 단체를 끌어안아야 했지만 예술의전당까지 세워졌으니 분산해서 각자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부가 곧바로 1999년 가을에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을 정기 국회에 회부해 국립극장 전속단체들을 별도 법인체로 만들게 했으며 예술의전당도 재단법인에서 특별법인으로 전환토록 했다. 이러한 법 정비에 따라 국립오페라단·발레단·합창단 등 3개 단체가 법인화돼 2000년에 예술의전당 상주단체로 떠나가게 됐다.
국립극장에는 극단·무용단·창극단·국악관현악단, 4개 단체만 오롯이 남게 됐다. 이러한 국립극장의 재편은 설립 50년 만인데, 그동안 내외적으로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우리나라의 무대예술, 즉 연극을 비롯해 한국무용·발레·국악·오페라·교향악 등이 안착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국립극장이 50년 만에 설립 당시와 가장 가까울 정도로 몸이 가벼워지면서 경영의 합리화라든지 교육적 기능의 확장 같은 극장의 순기능을 찾으려 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자세였다. 특히 행정직원의 수를 반으로 감축했다든지, 팀 체제로의 전환, 기획력과 마케팅의 강화 및 디지털화 등은 선진적인 변화였다. 게다가 ‘국립극장 봉사헌장’ 발표 역시 구태를 벗어나 예술이야말로 현대적인 서비스 상품이라는 인식을 알린 것이어서 흥미를 끌만했다. 국립극장이 30여 년 만에 건물 전체의 쇄신에 들어가면서 제도의 선진화도 꾀했는데, 이를테면 단장제를 예술감독제로 전환하고 창작 전권을 위임하기도 했다.
국립극장을 크게 변화시킨 김명곤이 임기를 마치자 중진 무대미술가 신선희가 바통을 이어받아 국립극장을 ’한국적 창작 공연을 만드는 유일한 기관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나섰다. 즉 그는 전임자가 벌여놓은 여러 가지 일을 정비하는 한편 과거 국립극장이 제작한 우수 작품을 발굴해 상설 레퍼토리화하는 것과 아울러 ‘국립극장 자료실을 연구실이나 연구소로 확대해 공연을 미디어 콘텐츠로 바꿔 유통시키고 옛것을 복원하는 기능을 하려 한다’고 했다. 그가 벌인 여러 가지 사업 중 업적으로 남을 만한 일은 역시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과 공연예술박물관을 만들고 야외극장을 쓸만한 공연장으로 꾸민 것이다.
공연예술박물관이야말로 신선희 극장장의 가장 큰 업적인데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후임자들이 더는 진전시키지 못한 것이 아쉽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신선희의 후임으로 언론인 출신 임연철이 부임해 국립극장에서 부족했던 마케팅, 홍보, 그리고 교육 기능을 대폭 강화한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시민의 예술교양 강화를 통한 관객층 확대가 궁극적 목표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국립극단이 법인화돼 용산구 서계동으로 이전하게 된다.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극의 맥을 이어온 전통 있는 국립극단이 그 역사를 함께해 온 국립극장을 나가게 된 것이다. 국립극장은 한 나라의 역사·전통·정서, 그리고 꿈을 농축 공연예술화해서 보여주는 신성한 창이다. 그래서 국립극장을 가리켜 한 나라의 얼굴이고 자존심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고대 희랍의 극장 발전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연극은 국립극장의 알파와 오메가다. 1950년 국립극장 설립도 ‘연극 문화의 향상과 민족예술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는데, 하나밖에 없는 국립극단을 독립시킨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국립극단은 재단법인화된 지 5년 만에 명동예술극장과 통합돼, 명동예술극장을 전용극장으로 사용하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전속 단원 없이 시즌 단원제로 운영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1680년 설립된 프랑스의 국립극장 코메디프랑세즈가 지금까지 전속 단원을 두고 작품 개발에 주력하는 것과 비교하면, 국립극장에 극단이 없고, 극단에 전속 단원이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국립극장은 창극단·무용단·국악관현악단 3개 전속단체를 두고 있으며, 그중 장기 공연할 수 있는 단체는 없다. 신체 구조상 판소리를 오래 할 수 없고, 춤도 몇 달씩 출 수 있는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국립극장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노력을 계속한 극장장이 예술의전당에서 다년간 노하우를 쌓은 안호상 극장장이었다. 그는 2012년 정월에 취임하자마자 침체 국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국립극장에 레퍼토리시즌제를 도입해 단번에 고정 관객층까지 만들어내는 수완을 보여주었고, 극장장의 운영 능력에 따라 공연장의 성쇠가 좌우된다는 하나의 좋은 사례도 제시했다.
그리고 신축 당시부터 대극장의 구조상 결함으로 애를 먹던 차에 해오름극장이 40여 년 만인 2018년 4월에 리모델링에 들어갔고 2018년 9월에 김철호가 새로 극장장으로 취임했다. 국립극장이 설립 이래 처음으로 국악인 출신을 선택한 것은 의미 있는 실험이라고 본다. 창극·한국무용·국악 관현악 등 전통예술 단체만 3개를 거느리는 극장 운영을 국악인이 맡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극장 역사 70년 동안에 34명의 극장장이 드나들었다는 것은 국립극장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34명 중에서도 서항석 11년, 허규 8년, 김명곤 6년, 안호상 5년을 합치면 30년이므로 40년 동안에 극장장이 29명이나 바뀌었다는 이야기이며, 각각 1~2년 남짓 근무한 것이 된다. 그뿐이 아니고 극장장의 일반직 고위공무원(2급, 일반임기제)이라는 직급 또한 설립 당시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국립극장의 위상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대한민국은 국민소득 3만 2천 달러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성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만큼 문화적 성장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지금 시급한 것은 번듯한 제2국립극장 건립과 국립극단의 활성화다. 예술 창작의 산실인 공연장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문화가 융성하고 사회 전체가 성숙하기 마련이다. 현재 추진 중인 해오름극장 리모델링과 더불어 제2국립극장 건립과 함께 제2국립극단을 만들어 문화예술의 활성화를 이뤄내야 할 것이다.


유민영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연극평론가

 

 

 

※외부 필자의 글은 국립극장의 공식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사이트 지도

사이트 지도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