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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1월호 Vol.360

개성으로 우뚝한 거인

내일의 전통 | 이헌정의 달항아리

 

조선 시대의 달항아리는 영원한 고전 같은 것이다. 그 안에 담긴 깊은 미감과 철학, 자연관과 세계관은 수많은 창작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헌정의 달항아리는 그 결과물 중에서도 가장 자신만만하게 당당한 기세와 오라를 뿜어낸다.    


10여 년 전이었다, 달항아리를 깊이 접한 때가. 당시 나는 하이엔드 라이프스타일 잡지에서 문화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건축가든, 안무가든, 사상가든 누구를 만나도 진정 근사한 삶이란 어떻게 사는 것이냐, 한국 최고의 보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물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상가 기 소르망을 인터뷰하며 위 질문을 했다. 그는 몇 초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 최고의 보물은 달항아리”라고 언급했다.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잡념이 모두 사라진다. 그저 몰입해서 보게 된다”라고 첨언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찬양인가. 온갖 잡념으로 들끓는 우리의 머릿속을 백지처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자연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 하동문화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평사리 최참판댁 일원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 대청마루에 앉아 저 아래로 펼쳐진 평야와 지리산 자락을 보고 있으니 머릿속이 마법처럼 개운해졌다. 어떤 잡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듯 위대한 자연의 힘을, 높이 35~50센티미터의 항아리가 똑같이 발휘할 수 있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이헌정_달항아리_CERAMIC_360X370X350(H)MM_2019

 

그저 무심한 큰 덩어리
그때부터 달항아리는 꼭 한 점 집에 들여놓고 싶은 열애의 대상이 됐다. 그 뒤로도 달항아리를 아끼고 찬양하는 수많은 예술가와 문화 애호가를 만났다. 달항아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힘과 매력을 넌지시 건넸다. 지난주에는 조선백자의 미감을 가장 현대적으로 보여준다는 도예가 이기조 선생을 만나 달항아리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그가 말했다. “조선 시대 달항아리는 임금에게까지 올라가는 진상품이었다. 그런 대단한 물건의 외양을 보자면 한쪽이 기우뚱하거나 삐뚜름한데 그것을 도공도, 검사관도, 심지어 임금마저 ‘어, 이거 멋진데?’ 하고 말한다. 그것이 대단한 것이다. 달항아리는 조선 시대 최고의 미적 수준이나 철학과도 연결되는 무심한 큰 덩어리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렇듯 견고한 오라Aura를 자랑하는 달항아리는 많은 작가에 의해 수없이 변주됐다. 결이 고운 순백의 우주, 텅 빈 듯 꽉 찬 미의 세계는 그런 변주에서도 심지처럼 굳건했다.
그러다 청담동에 새로 개관한 갤러리 오 스퀘어에서 이헌정 작가의 달항아리를 봤다. 충격적이었다. 그의 달항아리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또 다른 우주였다. 그곳에서 천체는 자유분방해 보였다. 기우뚱 퍼지듯 앉아 있고, 얼굴 한가운데 가로로 깊은 흉터가 나 있고, 금배지를 단 모습이라니. 달항아리를 사람 같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그 모습이 흡사 각자의 개성으로 당당한 거인 같았다. 성주신 같은 존재가 그 안에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도예가이면서 조각가이고, 조각가이면서 설치미술가이기도 한 이헌정 작가를 나는 이 시대 최고의 예술가 중 한 명이라 생각한다. 재료와 사상을 갖고 노는 경지에 이르렀달까. 세라믹과 콘크리트로 테이블을 만들고, 나무와 도자기로 커다란 집까지 만들어 선보이는 그에게 질서와 규칙은 그저 가뿐히 뛰어넘고 마는 낮은 허들에 불과해 보인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국의 미감을 재치 있게 보여준다. 그가 만든 동물상을 한번 보라. 도자기로 만든 호랑이는 한쪽 입꼬리가 싱긋 올라가 있다. 교과서에서 봤던, 민화 속 호랑이의 개구장이 같은 미소가 아닌가. 미술사학자들이 ‘해학’이라 통칭했던.

 

 

 

 

기존 질서와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괴짜’의 여유
노먼 포스터·수보드 굽타·제임스 터렐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 이헌정 작가는 공공연하게 말해 왔다. “일본의 예술은 완벽한 기술을 보여주려 하고 중국은 자연보다 큰 존재감의 무엇을 만들어내려 한다. 한국은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한다. 달항아리가 대표적이다. 완벽한 원을 추구하다가 어느 순간 확 던져버리는 감성이 있다. 그 지점에서 배우는 것이 많다.” 그러면서 그는 “표면적으로 완벽한 달항아리의 미를 추구할 생각이 없다!”라고 강조한다.
무언가를 반복 재생산하는 것을 싫어하는 그는 ‘이러면 어때, 또 저러면 어때?’ 하는 마음으로 작업한다. 달항아리는 그 자체로 ‘고수의 여유’. 그런 여유와 배짱, 자신만만함과 배포가 만나 기존에 없던 새로운 형태와 오라를 만들어냈다.
좋은 예술은 화수분처럼 오랜 시간 계속해서 관람객에게 영감을 준다. 상상력을 던져주지 못하는 예술은 유효기간이 짧다. 그런 점에서 달항아리는 최고의 예술이라 할 만하다. 그 순백의 몸체에 응축된 세계는 한편에서 사람의 머릿속을 비우고, 또 한편에서 무심의 경지를 느끼게 하며, 또 한편에서는 자유분방한 예술을 자극한다.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도 입체적이다. 커다란 두 개의 사발을 따로 만들어 합체하는데 그렇게 결합한 두 개의 몸은 1,250도가 넘는 고온을 견디며 비로소 하나의 몸체로 완성된다. 나는 그 과정 자체가 ‘우주적’이라고 생각한다. 흙의 밀도와 유약의 두께, 가마 속 압력과 중력 등 수많은 창작 요소가 온 힘을 합쳐 만들어낸 생명. 
근사하고 멋진 달항아리 하나 갖고 싶어 이 작가, 저 작가 전시를 찾아가고 어떤 작품을 구매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이헌정 작가의 작품이 강력한 후보로 훅 들어왔다. 기존에 봐오던 것들과 전혀 다른 미감인데 무작정 끌린다. 오토바이도 잘 타는 우등생처럼 거침없고, 세련된 풍모가 은근하고 짜릿한 쾌감을 준다. 권대섭 작가나 이기조 작가의 달항아리와 이헌정 작가의 달항아리를 나란히 붙여놓아도 참으로 멋진 그림이 될 것 같다.

 

정성갑 월간지 ‘럭셔리’와 네이버 디자인프레스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20년 가까이 일했다. 그림과 사진, 공예품을 유독 사랑한다. ‘근사한 일상’과 ‘생활의 재미’를 키워드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으며 남다른 예술과 이벤트를 하나씩 소개하는 한 점 플랫폼 ‘클립CLIP’을 운영한다. 
사진 갤러리 오 스퀘어·정성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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