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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1월호 Vol.360

사진으로 보는 국립극장 70년사

깊이보기 둘 | 국립극장 70주년 특집

 

7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반세기가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국립극장이 다져온 굴곡의 역사를 사진과 함께 되짚어본다.

 

구 부민관 건물 c. 한국콘텐츠진흥원

 

1950년 4월 29일
국립극장 창립

국립극장은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1950년 4월 29일 개관했다. 극장 건물은 1935년 건립된 1,800석 규모의 부민관(현 서울특별시의회 의사당)이며, 초대 극장장은 유치진이었다. 민족예술의 발전과 연극 문화의 향상을 목적으로 설립한 국립극장은 산하에 극단 외 교향음악단·합창단·가극단 및 기관을 설치할 수 있게 돼 있었으나, 광복 직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전속 극단만 우선 출범했다. 그중 실질적인 운영은 신협 하나만 가능했다.

 

 

개막공연 ‘원술랑’(1950)

 

1950년 4월 30일
개막공연 ‘원술랑’

국립극장이 첫 공연으로 올린 작품은 ‘원술랑’(유치진 작·허석 연출)으로 신라 시대 김유신의 아들 원술의 이야기를 다룬다. 공연은 1주일 만에 5만 명이 관람할 정도로 흥행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40여만 명이었는데, 그중 5만 명이 ‘원술랑’을 관극했다는 것은 신극사에서 길이 남을만한 사건이었다.

 

신협 ‘뇌우’ 공연 프로그램북 표지

 

1950년 6월 25일
개관 58일 만에 기능 정지

연극 공연에 이어, 두 번째 무대로 국극사를 초청해 창극 ‘만리장성’을 무대에 올리고, 창작오페라 ‘춘향전’과 무용 ‘인어공주’ 등을 선보였다. 이어 신협의 제2회 공연인 ‘뇌우’(조우 작·김광주 역·유치진 연출)는 관객들의 요청으로 앙코르 공연까지 했고, 관람객은 무려 7만 5천 명가량이었다. 국립극장은 개관 한 달여 동안 단 서너 편의 공연으로 서울 시민의 정신적 위안처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다. 뒤이어 제3회 공연을 준비하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 개관 58일 만에 기능 정지 상태에 접어들었다.

 

 

대구 문화극장 건물 전경

 

1953년 2월 13일
대구 문화극장
피난을 간 상황에서 국립극장은 어렵사리 대구 문화극장을 인수해 운영을 다시 시작한다. 2대 극장장으로 서항석이 임명되고, 재개관 작품으로 ‘야화’(윤백남 작·서항석 연출)를 무대에 올린다. 하지만 전속단원도 없는 상태로 3~4일 만에 무리하게 올린 공연은 좋은 평을 받지 못한다. 게다가 전쟁의 혼란스러움 속에서 여러 비판과 논란에 휩싸인 국립극장은 명맥만 유지할 뿐 별다른 활동 없이 오랜 공백기가 이어진다.

 

명동 시공관 건물을 사용하던 시절의 국립극장

 

1957년 6월 1일
서울 명동 시공관

대구에 임시로 내려가 있었던 국립극장이 만 4년 만에 다시 서울로 온다.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만에야 돌아오게 된 이유는 극장으로 사용할 마땅한 공간이 없는 데 있었다. 기존의 부민관 자리는 국회가 사용하고 있었고, 건물을 새로 지을 형편도 아니었다. 가까스로 명동에 있던 시공관 건물을 서울시와 공동으로 사용하는 조건으로 다시 극적인 재개관을 한다. 전속단체로는 전쟁 중 사설 극단으로 활동하던 신협 단원들을 중심으로 다시 국립극단을 새롭게 꾸린다. 명동에서 연 첫 공연은 ‘신앙과 고향’(카를 쇤헤어 작·서항석 역·홍해성 연출)이다.

 

 

 

(왼) 국립무용단 ‘영은 살아있다’
(오) 국립국극단 ‘춘향전’(1963) 대본 표지

 

 

국립오페라단 ‘왕자호동’(1962)

 

1962년 1월 15일
국립국극단·국립무용단·국립오페라단 창단

국립극장 전속단체로 국립극단 이외에 국립국극단(현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오페라단이 창단된다. 초대 단장에는 국립국극단에 김연수, 국립무용단에 송범, 국립오페라단에 이인범이 각각 임명된다. 명동 국립극장 재개관과 맞물려 창단 공연으로 올린 작품은 창극 ‘춘향전’(박광 각색·김연수 지도), 무용 ‘백의환상’(임성남 구성·안무)·무용 ‘영은 살아있다’(송범 구성·안무)·무용 ‘쌍곡선’(임성남 구성·안무), 오페라 ‘왕자호동’(유치진 작·장일남 작곡·오현명 연출)이다.

 

 

 

(왼) 명동 국립극장 객석

(오) 명동 국립극장 개관식 장면

1962년 3월 21일
국립극장 재개관, 명동 국립극장

1961년 11월 시민회관이 개관하면서 서울시와 공동으로 사용하던 시공관은 이제 국립극장 단독으로 사용하게 됐다. 하지만 광복과 함께 15년 동안 거의 보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설이 낙후돼 있었다. 그해 12월 총공사비 1억 8천만 환을 들여서 객석·무대·냉난방시설·화장실·로비 등을 전면 개수했다. 대대적인 보수를 마치고 네 개의 전속단체와 전용극장을 갖게 된 국립극장은 의욕적으로 출발했으나, 정부의 실질적인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는 재정난 속에서 제 역할을 하기 힘든 상황이 지속됐다.

 

남산 국립극장 착공현장

 

1967년 10월 12일
신축 국립극장 착공

정부의 종합민족문화센터 건립 구상이 발표되고, 장충동에 지하 1층·지상 3층의 새 국립극장을 짓기 위한 공사가 시작됐다. 종합민족문화센터는 처음에 국립극장·국립도서관·국립국악원 등 총 10개 기관이 들어설 계획이었다. 그러나 막대한 예산을 감당할 수 없어 수차례의 계획 수정 끝에 장충동에 국립극장과 국악사양성소 2개소만 들어서게 됐다.

 

국립교향악단

 

1969년 3월 8일
국립교향악단 창단
국립극장은 KBS로부터 교향악단을 인수해 국립교향악단을 꾸렸다. 초대 단장은 이용상, 상임지휘자로 임원식을 임명하고 90명 규모의 단원으로 창단 첫 연주회를 열었다. 전신인 KBS교향악단은 1956년 9월 3일 서울방송교향악단이라는 이름으로 창단된 바 있다.

 

국립가무단 ‘대춘향전’(1974)

 

1972년 1월 11일
예그린악단 인수

뮤지컬 공연을 해오던 민간단체 예그린악단이 국고보조단체로 지정되면서, 국립극장과 관계를 맺었다. 1973년 국립가무단으로 명칭이 변경됐고, 이듬해 첫 공연 ‘대춘향전’을 무대에 올렸다. 예그린악단은 민속예술을 지향하며 1961년 유력 정치인과 민간 기업의 후원으로 탄생했다. 수차례의 해산과 재창단을 거듭하다가 1966년에는 초기 한국 뮤지컬의 대표작이라 할 ‘살짜기 옵서예’를 공연하기도 했다.

 

 

(왼) 국립합창단

(오) 국립발레단 ‘지귀의 꿈’(1973)

 

 

1973년 5월 1일
국립합창단 창단, 국립무용단·국립발레단 분리

1973년 신축 국립극장 개관을 앞두고 국립극장은 전속단체를 크게 개편했다. 새롭게 국립합창단이 창단되고, 1962년 창단된 국립무용단은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으로 분리돼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국립합창단 단장에는 나영수, 국립무용단 단장은 송범, 국립발레단 단장은 임성남이 각각 임명됐다.

 

(왼) 신축 국립극장 개관 공연 ‘성웅 이순신’(1973)

(오) 장충동에 완공된 국립극장 전경

 

 

1973년 10월 17일
신축 국립극장 개관, 장충동 시기

아시아 최대 규모의 신축 국립극장이 6년여의 긴 공사 끝에 1973년 10월 17일 개관을 맞이했다.  대극장은 1,500석, 소극장은 330석 규모였다. 이와 함께 전속단체도 국립극단·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발레단·국립오페라단·국립교향악단·국립가무단·국립합창단으로 8개가 됐다. 직원도 3배 이상 늘어나, 단원과 직원을 포함해 총 529명이었다. 개관 공연으로 국립극단의 ‘성웅 이순신’(이재현 작·허규 연출)이 무대에 올랐다.


「월간 국립극장」 창간호

 

1977년 4월 1일

「월간 국립극장」 창간
국립극장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미르」의 시조는 1977년 4월 창간된 「월간 국립극장」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책 명칭도 여러 번 바뀌었다. 「극장예술」 「국립극장 소식」 「국립중앙극장」 「갈채」라는 이름을 거쳐, 용띠 해이던 2000년 4월부터 국립극장 「미르」로 불렸다. ‘미르’는 용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꿈틀거리며 승천하는 용처럼, 우리 민족 문화예술을 지키면서 세계에 널리 전파하겠다는 국립극장의 의지가 담겨 있다.

 

1977년 11월 2일
서울시립가무단 재창단

국립가무단이 서울시로 이관되고, 50명 규모의 서울시립가무단(현 서울시뮤지컬단)으로 재창단했다. 1972년부터 1977년까지 국립극장 전속단체로 활동하면서, 총 9회의 공연을 올린 바 있다. 마지막 공연은 ‘시집가는 날’(오영진 작·허규 연출)이다.

 

1981년 8월 1일
국립교향악단 KBS로 이관

굴곡 많던 국립교향악단이 발전적으로 해체돼 KBS로 다시 이관됐다. 그간 연 14회의 정기연주회와 4회의 실내악 연주회를 해왔다. 마지막 공연은 7월 ‘제215회 정기연주회’(박은성 지휘)였는데, 안타깝게 냉방기 고장으로 초만원의 관객들과 연주자들이 더위에 애를 먹었다.

 

 

실험무대에서 열린 장산도 씻김굿 장면(1981)

 

1981년 10월 28일
실험무대 개관

3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마당식 소극장 실험무대가 개관했다. 8월 초 전문 예술인 허규 극장장이 취임한 후, 실험적이며 전통적인 공연물을 상연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이곳은 국립교향악단이 KBS로 이관되기 전, 연습실로 쓰던 대극장 지하 공간을 개조한 것이었다. 개관 기념 공연으로 장산도 씻김굿·밀양5북춤·승무·진도 다시라기·봉산탈춤 등이 상연됐다.

 

 

놀이마당에서의 ‘제13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 공연’

 

1982년 5월 15일
놀이마당 개장

공연 공간의 다양한 변화를 위해 극장 광장 한 모퉁이에 야외 놀이마당을 개장했다. 총 244평, 600석 규모의 계단식 노천극장은 1미터 70센티 높이의 경사면에 6개의 계단을 만들었으며 계단 한 줄에 100명씩 앉을 수 있었다. 야외 놀이마당은 전문 예술인뿐만 아니라 학생 등에게 무료로 대관됐고, 모든 공연을 무료로 공개했다. 첫 공연은 ‘제13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으로 연일 많은 관람객이 밀려들어 성황을 이뤘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연주회’(1995)

 

1995년 1월 1일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박범훈을 단장으로 한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새롭게 창단됐다. 생활 속에 함께하는 국악, 세계음악과 나란히 하는 국악을 추구했으며, 국악기 개량 사업도 의욕 있게 추진했다. 개량 국악기를 사용한 ‘창단연주회’(박범훈 지휘)가 6월 대극장에서 펼쳐지며, 여러 전속단체와 협력해 악·가·무가 어우러지는 풍성한 음악회를 연출했다.

 

2000년 1월 1일
책임운영기관으로 체제 변화

국립극장이 책임운영기관으로 체제를 바꾸며 민간 극장장 시대를 맞이했다. 책임운영기관이란 기관을 운영하는 데 자율성을 갖는 행정기관으로, 기관장은 행정과 재정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운영 성과를 책임지게 된다. 김명곤 전 극장장을 시작으로, 신선희·임연철·안호상, 현재의 김철호까지 다섯 명의 문화 전문가가 극장장 자리에 올라 국립극장의 변화를 주도했다.

 

2000년 2월 1일
국립오페라단·국립발레단·국립합창단 독립

전속단체로 활동하던 국립오페라단·국립발레단·국립합창단이 재단법인으로 독립해 홀로서기에 나섰다. 국립극장을 떠난 세 단체는 예술의전당 상주단체로 자리를 옮겨 예술 활동을 이어갔고, 이후에도 국립극장은 이들 단체와 지속적으로 공동 작업을 펼치며 협력 관계를 구축해 나갔다.

 

2000년 5월
대극장과 소극장 새 명칭 얻어

개관 50주년을 맞아 대극장과 소극장이 해오름극장과 달오름극장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됐다. 일반인 공모를 거쳤으며, 248명이 819건에 이르는 아이디어로 호응했다. 새 명칭은 극장 내 심사와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의견 수렴, 인터넷 투표를 통해 선정됐는데, 무려 60퍼센트에 이르는 투표율로 최종 명칭이 당선됐다.

 

2001년 5월 23일
별오름극장 개관

별관 건물 내에 150석 규모의 소극장 별오름극장이 개관했다. 자유로운 창작 정신과 새로운 공연 양식 개발을 위한 무대로, 1981년 대극장 지하에 개관한 실험무대를 이어받아 지어졌다. 별관 건물은 1967년 준공돼 국악사양성소(현 국악중·고등학교)로 사용되다가 1994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이 잠시 입주했던 곳이다. 한편, 2000년 4월에는 별관 운동장을 주차장으로 개보수하기도 했다.

 

 

하늘극장 초창기 모습

 

2002년 6월 11일
하늘극장 개관

해오름극장과 달오름극장 사이에 하늘을 향해 열린 야외 원형극장, 하늘극장이 만들어졌다. 1982년 야외 놀이마당이란 이름으로 개장돼 사용하던 공간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 극장은 600여 개의 객석과 이동식 첨단 조명과 음향 등의 시설을 갖추고 다양한 문화행사 공간으로 거듭났다.

 

2004년 10월 29일
해오름극장 새단장

해오름극장이 새단장을 마쳤다. 근대 건축물로서의 가치가 있는 건물 외형은 살리되, 무대와 객석, 로비 등을 전면 수정해 현대적 공연장으로 탈바꿈을 시도했다. 25.5도 높아진 객석 경사도와 엇갈린 좌석 배치로 관객 시야 확보에 힘썼으며, 좌석 수도 1,522석에서 1,563석으로 늘어났다. 68대의 스피커를 새롭게 구비해, 어느 좌석에서나 입체적으로 음향을 들을 수 있게 됐다. 로비 중앙에 있던 계단을 없애 로비 활용도를 높였으며, 극장 외부 전면도 유리로 교체했다. 81평 규모의 서가 시설을 갖춘 공연자료실을 해오름극장 4층에 설치해 관객 편의를 도왔다.

 

2006년 4월
별오름극장 객석 새 단장

젊은 예술인들을 위한 실험과 창작의 장으로 자리매김한 별오름극장의 객석 전체를 수리했다. 2003년 로비·객석·무대·분장실 등 전반에 걸친 환경개선공사가 이뤄졌지만, 낡은 객석으로 인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다시 새 단장에 들어간 것. 전동 수납식 객석 74석과 이동식 30여 석을 설치해 무대 공간 활용이 더욱 용이해졌다.

 

 

재개관 후 하늘극장

 

2008년 4월 30일

KB청소년하늘극장 개관
KB국민은행의 협찬을 받아 야외 원형극장이던 기존 하늘극장이 돔형 극장으로 새 단장했다. 13미터의 지상 2층 높이 건물에 씌워진 은빛 돔 천장은 네 개의 부채꼴로 갈라지며 1분 이내에 열려 하늘을 활용하는 연출이 가능해졌다. 하늘극장에서 KB청소년하늘극장으로 명칭을 바꾼 새 극장의 첫 공연은 ‘2008 청소년 공연예술제’가 장식했다.

 

 

공연예술박물관 상설전시실

 

2009년 12월 23일
공연예술박물관 개관

국내 최초의 공연예술 전문박물관인 공연예술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공연예술 자료의 유실을 막고 수집·보존하며 전시·교육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박물관 설립은 공연예술계의 숙원이었다. 3년간의 긴 준비 끝에 개관한 공연예술박물관은 상설전시실을 비롯해, 기획전시실·아카이브실·수장고·교육실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현재 공연예술박물관이 소장한 자료는 31만여 점. 영상·음향·사진·도서 등 공연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직접 방문·이용 가능하며 디지털 아카이브도 구축돼 있다.

 

 

국립극단 ‘둥둥 낙랑둥’(2010)

 

2010년 4월 30일
국립극단 법인화

국립극단이 창단 60년 만에 법인화해 독립했다. 1950년 국립극장 출범과 동시에 유일한 전속단체로 출발한 국립극단은 국립극장과 역사를 함께하며 250여 편의 공연을 올렸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명맥을 이어온 국립극단은 ‘둥둥 낙랑둥’을 마지막으로 용산구 서계동으로 둥지를 옮겨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다.

 

 

(왼)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2013-2014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초연)

(오) 국립무용단 ‘묵향’ (2013-2014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초연)

 

국립국악관현악단 관현악시리즈 IV ‘내셔널&인터내셔널’ (2018-2019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초연)

 

2012년 9월 5일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제 도입

국립극장이 국내 공공극장으로는 처음으로 ‘레퍼토리시즌제’란 명칭의 시즌제를 도입했다. 시즌제란 극장이 기간을 정해서 프로그램을 미리 기획하고 관객과 계획을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관객은 관람 계획을 사전에 세울 수 있고, 극장은 작품 제작에 매진할 환경을 구축할 수 있으며, 양질의 레퍼토리 축적이 가능하다는 면에서 획기적 변화였다. 개막작은 국립창극단의 ‘수궁가’(아힘 프라이어 연출)였으며 2012년 9월 5일부터 2013년 6월 30일까지 10개월 동안 8개 국립 예술단체를 중심으로 총 79편의 공연이 이어졌다. 시즌 도입 전과 비교했을 때,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 3개 전속단체의 공연 편수와 횟수, 관람객 수 모두 세 배 이상 증가하는 등 비약적인 성과를 보여줬다. 전속단체를 보유한 제작극장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드라마틱한 변화는 거듭됐다. 특히 국내외 다양한 예술가들과의 협업으로 도전적 신작을 발표, 전통의 현대화 작업에 앞장섰으며 동시대성을 갖춘 우수 작품들을 대거 제작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장르와 연령대의 관객층을 유입, 국립극장은 어느때보다 활기차졌다. 프랑스 테아트르 드 라 빌, 칸 댄스 페스티벌 등 매년 해외의 저명한 극장과 축제 무대에 오르는 등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 전통예술의 우수성을 전파하기도 했다. 국립극장은 현재 아홉 번째 시즌을 진행 중이며, 해를 거듭할수록 전통을 바탕으로 한 동시대적 창작의 선두주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평가받는다.

 

 

2014년 2월 19일
달오름극장 재개관

달오름극장이 극 장르 전용 극장으로 전면 개보수를 마치고 재개관했다. 기존 407석에서 512석으로 객석 수가 늘어났고, 경사각을 좀 더 가파르게 만들어 관객의 시각선을 향상시켰다. 무대 면적을 2배 이상 넓히고 무대 깊이를 14미터에서 19미터로 늘리는 반면, 객석과 무대의 거리는 좁히고 돌출된 무대를 따라 객석을 에워싸게 만들어 공연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음향 잔향 시간을 늘려 관객이 배우의 육성을 더 또렷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한 것도 큰 변화였다. 무대 옆 공간, 프로시니엄 높이 등도 확장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개선, 공연자와 관객 모두에게 편리한 공간으로 거듭났다. 한편, 달오름극장은 2005년 외관을 통유리로 두르는 등 로비 개선과 객석 교체, 무대 설비 보강 등 한 차례 개보수 과정을 거친 바 있다.

 

2016년 10월 16일
뜰아래 연습장 건립

국립극장 3개 전속단체를 위한 새로운 연습장이 생겼다. 문화광장 아래에 위치한 뜰아래 연습장의 이름은 국립극장 직원과 전속단체 단원을 대상으로 한 명칭 공모를 통해 지어졌다. 전속단체의 규모와 공연 횟수에 견주어 연습 공간이 부족했던 문제를 해결하고, 장르별 특성에 맞춘 설계로 단원의 기량 향상과 작품의 완성도에 크게 도움을 주는 공간이다.

 

 

해오름극장 리모델링 조감도

 

2018년 4월 1일
해오름극장 리모델링 착공

1973년 개관 후, 한국 공연예술의 중심지로 수많은 관객을 만나온 해오름극장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할 준비에 한창이다. 해오름극장은 장충동에 개관할 당시 최첨단 시설을 갖춘 극장으로 주목받았으나, 40여 년간 사용되며 시설 노후로 인해 안전사고의 위험은 물론, 다양한 현대 공연 기법 구현을 위한 시설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번 리모델링으로 불편했던 객석의 시야 문제를 개선하고 자연음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무대 제작 환경도 최적화해 제작극장으로서의 기능 개선에 힘쓴다. 개관은 2020년 예정이다.

 

2018년 11일 26일
지하주차장 착공

관객 편의를 위해 지하주차장 공사에 돌입했다. 별관 건물 앞 지상주차장 하부 지하 공간을 활용해 지상 1층, 지하 2층 규모의 지하주차장이 조성된다. 약 580대의 주차 공간을 확보하고, 출차 동선을 2차선에서 3차선으로 확장해 공연 관람 후 출차 또한 용이하게 할 계획이다. 지하주차장 지상부에 방문객을 위한 편의휴게 공간까지 마련, 국립극장 내 녹지율을 높이고 쾌적한 문화 공간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2020년 완공할 예정이다.

 

정리 이정연·차경주 국립극장 홍보팀

 

*「미르」 1월호 17쪽 두 번째 줄 국립무용단 임성남에서 국립무용단 송범으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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