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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6월호 Vol.365

염원의 몸짓에서 발견한 삶

깊이보기 하나 | 공연 짚어보기

※국립극장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수도권 지역 공공시설 운영 중단 결정에 따라 국립무용단 ‘제의’ 공연을 취소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하단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https://www.ntok.go.kr/Community/BoardNotice/Details?articleId=194817

 

 

고색창연한 과거의 유산이 아닌 오늘날 제의의 의미를 살려 완성된 의식무들. 현대 옷을 입고 태동하는 거대한 ‘제의’ 속으로

 

인간이 초월적 존재에게 무언가를 비는 의식의 시작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의의 이런 강한 생명력은 염원의 실현 여부와는 별개로 그 행위 자체가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데서 비롯한다. 제의에 뿌리를 둔 우리 춤의 카타르시스가 이를 방증한다. 이로부터 국립무용단은 2015년 다양한 의식무를 한데 모아 치유와 정화의 거대한 장을 마련한 바 있다. 5년 만에 돌아온 국립무용단 ‘제의’는 최근 사회적 위기를 극복할 이들을 위해 또 한 번 위무慰撫의 몸짓을 선보인다.

 

기존 분류를 뛰어넘은 의식무의 향연
최근 몇 년 동안 전통 소재를 현대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데 매진해 온 국립무용단의 행보를 돌아보면 ‘제의’는 다소 독특한 작품이다. 종묘제례의 일무, 불교 의식무용의 바라춤과 나비춤·법고춤, 민속무용의 도살풀이, 궁중정재의 춘앵무 등 주로 원형 그대로 전승돼 온 춤이 도전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성격이 다른 의식무들이 잇따라 한 무대에서 중첩되는 장면은 일면 생경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시대와 종교별 분류에 따라 별개의 무대에서 연행된 이 춤을 단순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하는 것은 분명 쉬운 작업이 아니다.
국립무용단이 내세운 하나의 코드는 제목 그대로 제의다. 염원·희망·축원·감사와 같은 마음을 담은 제사와 그 의식에 따른 춤을 시대와 성격을 뛰어넘어 소환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는 고대 제천행사에서 출발해 조선 시대 종묘제례에 이르는 연대기적 서사가 동원되지만, ‘제의’는 유교의 일무와 불교의 바라춤·나비춤 등을 거쳐 민간신앙의 도살풀이춤, 궁중정재의 춘앵무를 넘나드는 변화무쌍함을 보여준다. 지루한 무용사 강의가 아닌, 제의와 의식무의 본래 의미에 초점을 맞춘 듯한 배치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때 눈여겨볼 점은 소재의 구성뿐만 아니라 의식무의 면면을 현대 감각으로 다양하게 재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무의 변형은 기본이다. 여기에 화려한 조명과 모던한 음악, 의상이 뒷받침되면서 ‘제의’의 의식무는 고색창연한 과거의 유산이 아닌 현재의 공연 양식으로 거듭난다. 이 작업은 특히 중요한데, 일반 관객에게 의식무는 공연장보다는 대개 교과서나 관광 정보지에서 접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제의’는 과거 의식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제의의 의미를 묻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격이 다른 여러 의식무를 엮다 보면 전개에 빈틈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를 메워주는 것이 동양 사상이다.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 양의兩儀, 사상四象, 8괘, 64괘까지 다채롭게 동원되는 동양 사상은 스토리텔링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의 메시지를 떠받치는 굳건한 토대 구실을 한다. 무극을 상징하는 것 같은 도입부의 연출이 대표적이다. 상의를 탈의한 남자가 하반신에 걸친 누더기 의상을 길게 늘어뜨린 채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이 동작은 마치 제의라는 키워드를 그대로 형상화한 것 같다.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영역에서 강렬한 에너지가 태동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이런 인상적인 출발은 무대 위 새로운 제의가 시작됨을 알리는 기능을 한다.

 

 

해체되고 재탄생하는 컨템퍼러리 의식무
일무佾舞는 국가무형문화재이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관복을 입은 이들이 열을 지어 격식 있는 몸짓을 펼치는 종묘제례의 의식무다. 일무의 ‘일佾’은 춤을 출 때 늘어선 줄을 가리키는 말로, 사일무는 16명(4×4), 육일무는 36명(6×6), 팔일무는 64명(8×8)이 대열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숫자에 엄격한 만큼 여러 의식무 중에서 격식이 가장 잘 보존된 춤이기도 하다. ‘제의’에서는 팔일무를 기본 콘셉트로 해 일무의 재해석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원래의 일무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춤이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현대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무대 위 30명의 인간 군상은 일무의 대열을 고수하면서도 일정한 음악과 음향에 따라 각자의 질서를 만들어낸다. 태엽 소리 혹은 시계추 소리 같은 기계음의 반복과 그에 맞춘 군무는 산업화된 현대사회의 단면을 떠올리게 한다. 64괘를 표현하는 현란한 조명의 운용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무용수들은 기존 일무의 획일적인 호흡이 아니라 동적이고 개성적인 몸짓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제의’에서 의식무가 본격적인 종교성을 보여주는 것은 역시 불교 의식에서 추는 작법作法 장면부터다. 불교적 색채의 음악과 함께 일부 무용수가 법복 느낌의 의상으로 변복하면 그 성격은 더욱 강해진다. 하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바라춤·나비춤·법고춤 역시 기존의 바라나 고깔·모란꽃·법고 같은 소품이나 소도구 없이 춤사위만으로 주제의 정서를 표현한다. 관객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불가의 의지나 신념뿐이다. 다만 악귀를 물리치고 마음을 정화하는 바라춤, 부드러운 춤사위로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나비춤, 인간을 구제하고자 하는 법고춤의 원래 성격은 무용수들의 몸짓 안에 여전히 담겨 있다. 
한편, 옷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군중 속에 등장하면 도살풀이춤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살풀이춤은 예부터 액이나 살을 예방하거나 풀기 위해 무속에서 추는 제의적 춤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기방으로 들어가면서 보기 좋게 양식화된 살풀이춤과 달리 도살풀이춤은 더 자연스럽고 민속적인 면을 가진 춤이다. ‘제의’에서는 압도적으로 긴 수건의 이미지로 ‘제의’라는 작품 전체의 지향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춘앵무는 드라마나 평창동계올림픽 등 국제 행사에 종종 출현하면서 상대적으로 친숙해진 춤이다. 조선 순조 때 효명세자가 순원왕후의 탄생 40주년을 기념해 만든 이 춤은 봄날 버드나무에서 지저귀는 꾀꼬리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된 정재다. 원형은 궁중 연향에서 화문석을 깔고 그 위에서만 연행되는 형식이지만, ‘제의’에서는 기본 동작만 모티프로 가져와 봄날 새 생명을 품은 여인을 무대에 등장시킨다. 정재는 기본적으로 이를 받는 사람에게 장수와 번영을 기원하는 춤이다. 여기서는 봄과 새 생명이라는 상징을 통해 관객에게 지속적인 안녕과 복을 기원함을 알 수 있다.

 

 

무無로 돌아가는 삶과 춤의 철학
시대를 가늠할 수 없는 독특한 선율로 ‘제의’를 조율하는 음악은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역이다. 거문고 연주자 박우재는 전통 구음과 재즈의 스캣 창법을 활용하는 등 신선한 실험을 통해 장면별 개성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한다. 이런 시도는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를 지탱하며 ‘제의’의 정체성을 완성해 준다.
LG아트센터 환경에 맞게 새롭게 단장한 무대도 눈여겨볼 만하다. 초연 당시의 무대는 ㄷ자 모양으로 닫힌 형태여서 무대의 전환이나 무용수의 등퇴장이 불가능한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작품을 통해 고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소통하려는 본래의 취지가 다소 퇴색됐다는 반응도 있었다. 이번 재연에서는 이런 점을 보완해 64괘의 상징을 반영한 8개의 벽체를 무대 양옆과 뒤에 설치해 그 사이로 등퇴장이 가능해졌다. 이를 통해 장면별 정서의 전환과 호흡이 한층 유연해질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초연에서도 강한 잔상을 남긴 조명과 모던한 의상의 존재감은 이번에도 특유의 미적 감각을 기대하게 한다.
‘제의’는 결국 무無에서 시작해 무無로 돌아가는 동양 사상과 관련이 있다. 무극에서 시작해 태극으로, 4괘로, 64괘로 분열하다가 다시 무(0)로 돌아가는 거대한 원圓의 섭리는 결국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자연의 순환과 다름없다. 인간의 삶도 이런 섭리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무언가를 염원하고 축원하는 행위 역시 잠깐의 만족을 지나 끝내 다시 비워내는 과정으로 수렴되기 마련이다. 이런 측면에서 ‘제의’는 인간 개개인의 단편적인 기복과 욕망을 그리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순환의 섭리를 깨달음으로써 무용한 번뇌를 비워내라는 철학적 주문에 가깝다.
흥미로운 것은 ‘제의’에서 제시하는 삶에 대한 통찰이 춤의 본질과도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어떤 물적 흔적 없이 찰나에 사라지고 마는 몸짓의 유한함은 일면 덧없어 보이지만, 그렇기에 더 소중하다. 어쩌면 이 작품이 일련의 의식 끝에서 말하려는 것도 이처럼 중첩되는 삶과 춤의 본질에 관한 것은 아닐까.

 

송준호 공연 칼럼니스트. 대학원에서 무용미학과 비평을 전공하고, ‘주간한국’과 ‘한국일보’‘더 뮤지컬’을 거쳤다. 공연예술의 다양한 변화를 주시하며 대학에서 춤 글쓰기를 강의한다

 

국립무용단 ‘제의’
2020년 6월 5~7일
LG아트센터
R석 5만 원 S석 3만 원 A석 2만 원
02-2280-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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