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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8월호 Vol.367

시즌제가 변화시킨 무대 공간

깊이보기 셋 | 해오름극장에서 꽃피운 무대미술


국립창극단 ‘적벽가’


2012년 시즌제의 시작과 함께 불어온 무대 미학의 새 변화. 해오름극장에서 펼쳐진 동시대 무대미술의 감각적 퍼레이드를 돌아본다

70년 역사를 지닌 국립극장은 2012년 시작된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도입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극장의 명성은 건축물의 역사성보다 극장이 보유한 레퍼토리의 예술적 완성도가 좌우한다. 레퍼토리 시스템은 최고의 예술적 완성도를 만들어내기 위해 인력과 공간이 극장 내에 확보돼 있어야 하므로 그동안 국내 극장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2010년, 국립극장의 모태와도 같았던 국립극단이 법인화돼 떠난 이후, 전통에 기반을 둔 창극단과 무용단, 국악관현악단으로 광활한 해오름극장의 무대와 객석을 채울 수밖에 없었던 국립극장은 
2012년, 새로운 돌파구로 과감하게 시즌제를 도입했다. 그 후 국립극장은 여덟 번이나 시즌을 이어왔다. 평균 객석 점유율이 높아진 건 물론이고, 관객층도 다양해졌다. 과연 무엇이 국립극장에 대한 관객의 고정관념을 깨고 관심을 끌어낼 수 있었을까? 작품을 흥행으로 이끈 요소는 기획과 홍보, 스타 예술가의 참여 등도 있지만, 예술적 완성도가 향상된 점이 가장 크다. 이것은 제작진이 일찍 구성되면서 시간과 예산이 합리적으로 관리되고 기술적 지원이 집중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다. 
다른 하나는 작품들이 지향한 ‘동시대성’에 대한 관객의 공감이다. 관객은 작품을 가장 먼저 시청각적인 요소를 통해서 인식한다. 기존의 전통적인 레퍼토리를 해체하거나 서양의 고전을 새롭게 동시대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과감한 실험 공간이 됨으로써 관객은 점차 국립극장에 호기심을 갖게 됐다. 
시즌제의 가장 큰 장점은 비교적 충분한 기획과 제작 기간을 확보할 수 있으며 집중적으로 홍보?마케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연출가와 디자이너로 구성된 제작진은 과거에 비해 공간을 매력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이러한 동시대적인 미적 감각이 국립극장을 활기차게 변화시켰다.  


국립창극단 ‘코카서스의 백묵원’


창극의 파격 행보와 무대미술의 발전
2012년 시작한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의 첫 번째 창극은 2011년 제작된 ‘수궁가’의 재공연이었다. 전설적 독일 연출가이자 무대미술가, 화가인 아힘 프라이어가 연출과 무대미술을 맡았다. 그는 거대한 해오름극장을 자신의 상상력을 펼치는 캔버스로 사용해 많은 화제를 만들어냈다. 직접 먹으로 그려낸 추상적 선들로 채워진 막과 과장된 의상, 마스크는 우화적인 느낌을 줬다. 전형적인 기존 무대 디자인을 벗어나 독자적인 스타일로 앙상블을 펼치는 모습은 한국 전통의 새 모습을 볼 좋은 기회였다.
시즌제 이후의 첫 번째 제작 창극은 ‘스릴러 창극’이라는 부제가 붙은 ‘장화홍련’이었다. 연출가 한태숙은 작품에 창극의 음악성과 드라마를 동등하게 융합하기 위해 관객이 무대를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아이디어를 요구했다. 이것은 무대와 객석이 널찍하게 분리된 해오름극장의 구조를 깨고 광활한 무대 위에 또 다른 돌출 무대와 600석 이상의 객석을 만들어냈다. 기존 객석을 막고 있던 스크린에는 극적 상황을 표현하는 영상이 투사되고 그 앞에는 높고 위태롭게 다리를 설치했다. 객석으로 돌출된 무대 덕에 관객은 배우의 노래와 연기, 기괴한 의상과 상징적인 영상을 더 생생하게 느끼는 새로운 체험이 가능했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관객과 배우 모두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메디아’는 2013년 창작됐고, 2014년에 재공연됐다. 대사 없이 음악으로만 작품이 흘러가는 창극, 일명 송스루Song-Through 뮤지컬 형식을 보여준 작품이다. 무대미술가 여신동이 무대 사면을 벽으로 막고 내부를 거의 영상만으로 채우는 실험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자궁을 연상시키는 동굴과 복수의 상징인 칼이 무대를 관통하면서 작품의 파격적인 흐름을 보여줬다. 억압된 사각 구조와 강렬한 색채의 영상 디자인은 작품의 심리 흐름에 따라 변화하며 시각적으로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창극에서 무대미술의 영역을 확장한 사례 중 하나다. 
‘적벽가’(2015)는 오페라 연출가 이소영과 무대미술가 김현정이 만든 해오름극장의 대형 무대에 잘 어울린 작품이다. 오케스트라 피트까지 연장된 북을 형상화한 둥근 무대, 회전무대 안에 설치된 앙상한 살만 남은 거대한 부채가 무대 디자인의 중심을 이뤘다. 가장 중요한 디자인 모티프로 부채를 선택한 이유를 무대 디자이너는 인터뷰를 통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창극에서는 부채를 통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고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제갈공명의 바람도 부채로 만들어지고요. 이 모든 것이 매우 흥미롭다 생각했고, 그래서 부채 모양을 작품의 중심적 시각 요소로 풀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모두 죽어 있는 자로 설정된 부분 때문에 종이가 제거된 뼈대만 남아 있는 앙상한 형상의 부챗살로 디자인을 발전시켰습니다. 회전 무대 위의 부채는 그 길이에 따라서 산이 되고, 골짜기·들판··배로 변신하게 될 거라 상상했지요. 명창이 부채를 펼치면 판소리가 생명을 가지듯, 무대 위의 부채가 펼쳐지면 영상과 소리가 합쳐지며 시공간을 변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적벽가’는 입체적 무대장치와 먹으로 그려진 추상적 붓질이 연결되며 시각적 앙상블을 이뤄냈다. 디자이너의 상상력으로 추상화된 부채 구조는 공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배우의 다양한 움직임을 만드는 역할을 했다. 현대의 오페라 공연에서 선호하는 무대미술처럼 상징화된 조각품이 조명과 위치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며 각 장면의 심리 상태를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무대로 평가된다.
정의신 연출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2015년 초연, 2017년에 재공연하며 매회 전석 매진을 기록한 작품이다. 해오름극장의 경직된 공간을 극적인 환상Dramatic Illusion보다는 극장주의Theatricalism적 수단이 강조되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변신시켰다. 관객은 텅 빈 객석을 가로질러 동그라미가 그려진 대형 막을 바라보며 무대 위로 입장하게 된다. 무대 위에는 무대를 삼면에서 볼 수 있는 가설 객석이 설치돼 있다. 그리고 재판정과 같은 객석에 들어서면 관객이면서 재판을 참관하는 시민이 된다. 오밀조밀하게 구성된 객석은 살짝 들어 올려져 있는 무대 위 배우들과 어느 방향에서든지 소통이 가능하도록 디자인됐다. 정면에 설치된 상부 공간에는 악사석이 마련됐고, 주변에는 전쟁 잔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배우는 승강 무대를 이용해 지하에서, 객석 한가운데에서, 객석 바깥쪽에서 어느 방향에서든지 등장할 수 있다. 위로부터 출렁다리가 내려오면 실제로 그루셰가 위험하게 다리를 건너기도 한다. 관객은 연극적 체험과 함께 판소리 공연과 같이 때때로 추임새를 넣어가면서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위해 진화된 무대를 관람할 수 있었다. 

국립무용단 ‘향연’


‘묵향’과 ‘향연’이 낳은 신드롬의 배경
국립무용단 대표 레퍼토리로 꼽히는 ‘묵향’(2013)과 ‘향연’(2015)은 패션·영화·공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스타 디자이너 정구호가 무대와 의상,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무대는 간결하고 소박하다. ‘묵향’은 빈 무대에 하얀 벽을 세우고 그 위를 영상으로 채웠다. 커다랗게 그려 내려간 사군자의 향기는 선비들의 절제와 곧은 정신을 표현하면서 섬세한 춤사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데 모든 것을 배려했다. ‘묵향’은 해오름극장의 여유 있는 무대와 잘 만난 작품이다. 미니멀리즘 경향의 무대미술이 본래 우리 전통에서 추구하는 여백과 절제의 미학과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다.  
‘향연’은 한국춤의 대가들이 전통 소품 레퍼토리를 사계절의 풍경으로 녹여낸 작품이다. 무용수의 절제된 움직임과 배열이 무대를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한다. 정갈하게 배치된 무대 속에서 거대한 전통 매듭으로 공간의 균형을 맞추고, 치마의 볼륨을 부풀리고 색을 대비하거나 통일해 한복의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빛에 의한 입체적인 형상화보다는 평면화된 빛으로 형식미를 강조해 새로운 미학을 실현한 무대다. ‘향연’이 관객에게 아름다우면서 강렬한 이미지를 각인시킨 것은 무엇보다 비주얼 콘셉트의 실현을 가장 우선에 두는 시각예술가 정구호의 집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동시대 관객으로 하여금 현대적 무대 예술로 한국무용에 한층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이정표를 만든 작품이다. 

국립극장 마당놀이


마당을 무대에 들이다
국립극장 마당놀이는 2014-2015 시즌 해오름극장에서 시작됐다. ‘심청이 온다’로 출발해 ‘춘향이 온다’ ‘놀보가 온다’ ‘춘풍이 온다’가 만들어졌고, 달오름극장·하늘극장으로 무대를 옮겨가며 공연했다. 마당놀이 시리즈는 레퍼토리시즌 시작 이후의 작품 중 가장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은 공연이기도 하다. 연말연시에 두 달 이상 해오름극장의 무대와 객석을 가득 채워 춤과 노래, 재담으로 모두를 즐겁게 한 공연이었다. ‘극장식 마당놀이’라는 새로운 형식이 말해 주듯, 기존의 객석과 무대 위의 객석이 무대를 에워싸고, 가운데 오케스트라 피트에서는 국악관현악단이 연주하며 해오름극장을 변화시켰다. 마당놀이가 추구하는 배우와 관객의 상호 교감이 가능한 완전한 개방형 무대Open Stage로 탈바꿈시켰다. 극장 상부 공간에는 깃발과 청사초롱이 매달려 분리된 무대와 객석을 서로 연결하고 축제 같은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리모델링 중인 해오름극장의 거대한 공간은 다른 실내 극장에서 만들어낼 수 없었던 것을 때때로 가능하게 해주는 의외의 장소이기도 했다.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이 시작된 이래, 국립극장은 전통을 기반으로 한 현대 감각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제 리모델링을 마친 후 새롭게 탄생하는 해오름극장에서도 이러한 에너지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이태섭 무대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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