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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8월호 Vol.367

뜨거움을 잠재울 서늘함

안목의 성장 | 테너시 윌리엄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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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섦과 친숙함의 경계에 자리한 드라마. 일상의 평범함 속에 깃든 갈등을 그려낸 작품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부단히 재해석되며 인간 본성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베어낸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이하 ‘양철지붕’)의 독불장군 아버지는 유럽 여행 때 아내가 사 온 골동품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유럽이란 곳은 커다란 고물상에 불과해. 고작 그거지. 낡아빠진 건물투성이고 그저 커다란 경매장이야. 다 썩어빠진 물건들뿐이야.” 
20세기 초 자신만만한 미국인에게 유럽의 이미지는 소용을 다한 낡은 폐품과 같았다. 예술도 예외가 아니었고, 연극도 마찬가지였다. 2500­­년 묵은 유럽의 노회한 극작술에 비하면 유진 오닐·아서 밀러·테너시 윌리엄스로 이어지는 20세기 전반기 미국 드라마는 그야말로 ‘신대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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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듯 다른 듯 새로운 극작술
테너시 윌리엄스의 ‘양철지붕’은 낯설고 기묘하면서도 친숙하고 매력적이었다. 낯설면서 친숙하다니? 그의 작품들은 마치 예술성과 대중성을 정의 내리기라도 하듯 그 경계선에 나열해 있다. 관객과 평단을 동시에 사로잡은 것. ‘양철지붕’이 대표적이다. 유럽 특유의 무거운 사상이나 이념은 없다. 주인공은 일상을 사는 평범한 현대인이다. 이 범상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희곡은 어느새 인간 본성의 심연에 다다르고, 인물들 간 쟁투는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전형성을 획득하게 된다. 삶의 현실과 세태에 밀착하면서도 인간 본성과 시대적 본질을 포박하는 이 놀라운 기술을 보라. 사상과 이념을 우회하면서도 인간 심리의 깊이와 폭을 확보하는 이 세련된 기법을 보라. 
무릇 드라마劇란 무엇인가? 호랑이虎와 멧돼지亥가 칼처럼 날카로운 이빨刀로 상대를 제압할 태세다. 성질이 난폭한 야생 멧돼지와 싸움의 명수 호랑이가 만났으니 불꽃이 튀고 피가 낭자할 수밖에. 유럽 드라마는 진영을 중시한다. 고전적 선악의 이분법적 전통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양철지붕’은 갈가리 찢어져 있다. 브릭과 매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와 고모, 매기와 메이, 그 누구도 서로 평탄하지 않다(속물성으로 하나 된 쿠퍼·메이 부부가 예외인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선악 구도도 불분명하다. 쿠퍼 부부의 탐욕이 얄밉긴 하지만, 그렇다고 브릭의 알코올중독과 무기력이 긍정될 수는 없다. 사건도 희미하다. 아버지의 암 선고가 집안사람들의 유일한 관심사지만, 그다지 폭발력 없이 누설되고 만다. 극적 사태를 호랑이와 멧돼지에게만 맡길 수는 없는 형국이다.
지난해 ‘양철지붕’은 국립극장에서  NT Live로 상영된 적이 있다. 시에나 밀러와 잭 오코넬이 주연이었고, 베니딕트 앤드루스가 연출을 맡았다. 앤드루스는 2014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이어 두 번째로 테너시 윌리엄스를 다뤘다(이 공연도 2016년 국립극장에서 NT Live로 상영됐다). 그가 ‘유리동물원’까지 무대에 올린다면 그랜드슬램 호칭을 주더라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파괴된 관계, 단절된 소통
‘양철지붕’이 전통적 극작술을 대신해 선택한 열쇠 말은 관계와 소통이다. 특히 브릭과 매기, 브릭과 아버지의 긴 대화가 희곡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들 관계가 끈끈하거나 소통이 원활한 건 아니다. 이미 파괴된 관계이고, 말라버린 소통이다. 그 원인을 역산하는 것이 ‘양철지붕’의 과제다. 고통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관계와 소통을 질식시킨 온갖 허위와 가식, 불신과 오해가 하나둘 실체를 드러낸다. 그 첫 페이지에는 브릭의 친구이자 동료이던 스키퍼의 자살 사건이 기록돼 있다.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에 인기 있는 스포츠 해설자이던 브릭이 폐인으로 전락한 사연에는 게이 연인으로 의심받던 스키퍼의 죽음이 밑줄 그어져 있고, 괄호 속에는 둘의 관계에 대한 매기의 질투가 주석 처리돼 있다. 브릭은 스키퍼와의 우정을 ‘그리스적 이상’으로 숭배했으나, 동성애라는 주변의 오해와 비난으로 인해 우정이 파탄 나자 결국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알코올중독과 자기비하의 폐쇄회로에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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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인간, 브릭
이쯤 되면 지붕 위의 고양이인 매기가 아니라, 자학적 무위증에 갇힌 ‘히키코모리’ 브릭이 문제다. 시종 술병을 끼고 흐느적거리는 이 구제 불능 알코올중독자가 ‘양철지붕’의 중심에 호출된 이유는 그가 원초적 생활력이 넘치는 매기의 욕망의 대상이자 2만 8천 에이커 농장의 유력한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행위와 의지에 갑부 농장주 집안의 사활과 매기의 운명이 달렸건만, 그는 완벽한 무의지의 화신이다. 생명의 공기가 증발한 진공이자, 뱀 껍질처럼 형태만 남은 채 알코올로 무위도식하는 무거운 공허다.
브릭을 유일하게 자극하는 것은 스키퍼와의 아픈 추억이다. 더 정확히 하자면, 스키퍼의 죽음과 관련된 모종의 비밀, 즉 매기가 스키퍼와 잠자리를 같이했고 이를 고백하려는 스키퍼의 전화를 브릭이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는 것, 그리고 이에 낙담한 스키퍼가 자살했다는 사실. 중요한 지점은 브릭이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은닉하고 오히려 동성애 혐오증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일종의 투사적 동일시라고 할 수 있는데, 자기가 처리할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을 상대방에게 전가해 똑같이 느끼게끔 만드는 방식이다. 자신의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비난을 혐오의 방식으로 스키퍼에게 떠넘긴 것이다. 이런 비정함이 스키퍼를 죽음으로 떠밀었고, 결국 자기 자신까지 (가사) 죽음 상태로 몰고 갔다. 그렇다면 브릭의 의지박약은 포기나 초탈이 아니라, 자신의 죄책감을 숨기려 전전긍긍하는 배신자의 몰골이며, 진실을 외면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징벌방에서 벌이는 도피 행각이다. 

극과 극은 한 몸이다
타인의 말을 블랙홀처럼 삼켜버리는 브릭과 자기 생각만을 일방적으로 내뱉는 아버지는 소통의 무능력이라는 차원에서는 본질적으로 한 짝이다. 배우자에게 방종을 허용하는 브릭이나 배우자를 윽박지르기만 하는 아버지는 소통에 무능력할 따름이다. 두 사람이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원점을 맴도는 기나긴 대화 장면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브릭과 매기는 상극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절대적 무의지 vs 동물적 생활력, 그리스적 이상에 매몰된 낭만주의 vs 지겨운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현실주의. 이는 하나의 인성이 품어야 할 두 측면에 불과하다. 이 둘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인간은 적당히 브릭적이고 적당히 매기적이다. 이 양극단이 두 사람에게 양분됐다는 게 이들의 비극이다. 소시민적 탐욕만 동일하게 공유한 쿠퍼 부부를 보라. 이들에겐 비극조차 과분하지 않은가. 물론 이 극단적 부부도 결국 브릭 부부와 한 짝이다. 쿠퍼 부부가 추구한 다산, 재산, 치밀한 준비성은 결말부에서 브릭 부부가 반복할 것이라고 암시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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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고 끝난 게 아니다
사실 브릭 부부의 결합을 암시하는 이 결말부가 가장 문제적이다. 파국으로 치닫는 유진 오닐의 가족드라마와는 달리 ‘양철지붕’은 애매모호하고 달짝지근하게 종결된다. 파탄 난 부부 관계, 부자 관계가 아버지의 암 선고를 계기로 가족 붕괴로 확장될 것이라는 근거 있는 예상은 느닷없는 복병을 만난다. 이 마당에 브릭과 매기의 합궁이라니! 갈등 구도는 브릭과 쿠퍼의 선악 대결로 급격하게 재편되고, 동성애는 없던 일로, 알코올중독은 사소한 결함으로 마무리된다. 대중의 입맛에 맞는 달달한 멜로드라마의 윤기를 띠면서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이것이 브로드웨이의 상업성에 투항한 것인지, 새로운 정서 영역을 개척한 것인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1,2,3 베니딕트 앤드루스가 연출한 NT Live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의 장면
4 미국 오클랜드 맨션의 연극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포스터

백승무 연극평론가,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장.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후 러시아학술원 산하 러시아문학연구소 박사 과정을 마쳤으며 서울대·중앙대·성균관대 등에 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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