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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호 Vol.370

국립창극단 최영훈

예술가의 초상

 

안숙선 딸이라 놀고먹는다는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었어요. 염라대왕 앞에서도 ‘최선을 다했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묵직한 거문고 소리에 이끌려 들어선 국악의 길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렸지만 자꾸 벌게지는 눈시울을 감추지 못한다. 대를 잇는 국악 집안에서, 심지어 안숙선 명창을 어머니로 둔 거문고 연주자라니, 까칠한 예술가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국립창극단 기악부 부수석 최영훈은 ‘울보’였다. 공연 중에도 거문고를 뜯으며 툭하면 눈물을 쏟는 걸로 유명하단다. 10월 말부터 공연 예정인 ‘아비.방연’도 슬픈 장면이 많다며 벌써부터 걱정이다.


“반주자로서 창자의 소리에 호흡을 맞춰야 하니 감정이입이 잘되는 것 같아요. 수성이라는 연주는 작곡된 곡 그대로가 아니라 노래 부르는 사람의 호흡에 선율과 장단을 맞춰야 하거든요. 그러니 같이 숨 쉬고, 속으로 따라 부르면서 희로애락을 느끼다 결국은 울게 돼요.”


최영훈은 창극의 수성 반주 연주자이면서 사라져 가던 거문고병창에 다시 불씨를 댕긴 소리꾼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안숙선 명창에게 소리와 가야금을 배운 그가 왜 전공은 거문고로 택했을까. 자신이 걷고 있는 힘든 길을 딸에게는 피하게 하고 싶은 모정 탓이다. “솔직히 저는 소리를 하고 싶었어요. 소리 배우기에 좋은 목을 타고났거든요.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목이 쉬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엄마는 당신이 가장 잘 이끌어줄 수 있는 분야인데도 굳이 말리셨죠. 중학교 선생님 권유로 국악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선배들의 거문고 소리가 너무 좋은 거예요. 늘 판소리나 가야금병창의 키 높은 소리만 듣다가 묵직한 저음을 들으니 끌렸던 거죠. 소리를 말리는 엄마와 갈등은 없었느냐고요? 엄마가 워낙 바쁘셔서 말다툼할 시간도 없었어요.(웃음)”    


사실 그는 네 살 때 국립극장 무대에 데뷔(?)했을 만큼 무대 체질이다. 1980년 국립창극단 정기공연 ‘최병도전’에서 남사당패 상쇠 역을 맡은 안숙선 명창이 무대로 나가자 백스테이지에서 놀던 그가 “엄마!”를 부르며 따라 나간 일화는 유명하다. “엄마가 창극단 막내로 태산 같은 선생님들을 모시던 때였고, 그때 저를 붙잡고 계시던 선생님도 유명한 분이셨거든요. 큰일 날 줄 알았는데 선생님들이나 관객 모두 웃고 넘겨주셔서 다행이었다고 해요. 저도 가끔 딸들이 공연을 보러 오지만, 애들이 무대로 뛰어나왔다고 생각하면 아찔하죠.(웃음)”


그의 세 딸도 국악 집안의 계보를 잇고 있다. 첫째와 둘째가 국립국악고등학교, 국립국악중학교에서 해금과 거문고를 전공하고 있고, 초등학생인 막내는 할머니에게 소리를 배운다고. “주말마다 애들을 앉혀놓고 소리 한 소절씩 가르치시는 걸 좋아하세요. 조카가 정식으로 배우겠다고 해서 저희 막내도 따라 들어가는데, 저도 같이 가서 조교 노릇을 하고 있죠. 엄마, 할머니에게 소리를 배우니 아이도 좋아하고, 중간에서 효도도 하는 셈이죠.(웃음) 첫째와 둘째도 할머니에게 조금씩 배웠어요. 애들도 소리를 하고 싶어 했는데, 제가 해보니 악기와 소리를 같이 할 줄 아는 게 여러모로 좋더라고요. 돌아보면 제게 악기를 시키신 엄마가 현명하셨죠.(웃음)”


하지만 ‘계보를 잇는다’라는 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대중문화가 대세인 지금 같은 시대에 흔들림 없이 전통예술의 길을 걷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의 세 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돌 수업 받으며 춤 배우러 다니는 친구도 있고, 주변에 끼 있는 애들도 많죠. 제가 국악 전공하라고 등 떠민 적은 없어요. 원하면 하라고 했죠. 나중에 슬럼프가 왔을 때 엄마 탓하면 답이 없을 테니까요. 아이들에게 슬럼프가 오고 딴청 피울 때도 있겠지만 기다려주는 수밖엔 방법이 없겠죠.”


아이들 얘기하다 문득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는지 눈시울이 붉어진다. 고등학교 시절 거문고를 붙잡고,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할 정도로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 혹시라도 ‘안숙선의 딸’로서 무임승차한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악착같이 매달렸다. “남들이 보는 기대치가 있으니 실력을 갖추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염라대왕이 너는 진짜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본 적 있느냐 물었을 때 ‘네’라고 대답할 정도로요. 그러니 제 아이들에게도 ‘혹시 국악이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는 일단 최선을 다해보라’고 말해 주죠. 미친 듯이 몰입해 모든 걸 걸었는데도 아니라면 그 노력을 토대로 다른 것에 도전해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가문의 피’도 대를 거치며 희석되기 마련이다. 딸들이 ‘빛나는 원석’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많이 보고 들은 만큼 “아는 게 많다”라는 게 엄마가 내비치는 무기다. “어려서도 국악이 나오면 듣고 좋다고 하지 채널을 돌리진 않았어요. 들어서 바로 좋은 음악도 있지만, 국악은 들을수록 깊어지는 음악이에요.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더 알고 싶어지고, 그러면 즐기게 되죠. ‘트로이의 여인들’ 공연을 앞두고 제가 집에서 채보를 위해 음원을 튼 적이 있는데, 아이가 그걸 매일 듣더군요. 저희 애들은 아이돌 가수보다 준수 삼촌, 평양이 삼촌 노래가 더 좋다고 해요.”

 

 

거문고병창의 전성기를 꿈꾸며
한동안 엄마와 딸이 한 직장에 다니는 특이한 경험도 했다. 안숙선 명창이 예술감독으로 재임하던 1999년에 창극단에 입단했기 때문이다. “기악부에 결원이 생겼는데, 엄마가 제게 말씀을 안 하셨어요. 해금 하는 친구가 원서를 내면서 말해 줘서 알게 됐죠. 그때 처음 엄마와 갈등이 있었어요. 저한테 시험 보지 말라고 하는데, 역차별받는다는 생각이 들어 몰래 원서를 냈죠. 한동안 엄마와 말도 안 했어요. 운 좋게 들어와 보니 학교와 실전은 너무 다르더군요. 관현악이나 정악, 산조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요. 실전에서 부딪혀야 했죠. 공부 안 하면 딱 ‘빽으로 들어왔다’라는 소리 듣게 생겼더군요. 안숙선 딸이라 들어와서 놀고먹고 있네, 이런 소리 안 들으려면 뭐든 바로 연주가 가능하도록 준비된 상태여야 할 것 같았어요. 그렇게 되려고 엄청 노력했죠.”


물론 엄마 덕을 제대로 본 적도 있다. 2012년 국립예술가 시리즈 무대로 선보인 ‘모전여전’ 공연은 잊을 수 없다. 안숙선 명창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해 자신의 대표작 ‘안숙선의 토끼 이야기’를 ‘최영훈의 토끼 이야기’로 재구성해 선물했고, 가야금병창 대표곡들을 편곡해 사라져가던 거문고병창을 부활시킨 무대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쉬움이 가장 많이 남는 무대이기도 하다. “엄마가 거의 연출하다시피 하며 제가 돋보이게끔 무대를 꾸며주셨거든요. 노래도 거문고도, 제 공력이 부족해서 힘들었어요. 근데 다음번에 하라고 하면 정말 잘할 것 같아요.”


하지만 ‘모전여전’으로 부활시킨 거문고병창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 과제가 됐다. “요즘엔 정년 전과 후 직업을 두 개 준비해야 된다고들 하잖아요. 저는 거문고병창 레퍼토리를 많이 만들려고 해요. 후배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어요. 거문고는 개량도 거의 안 된 악기라 레퍼토리가 많지 않거든요. 소리에 거문고 반주를 입힌 레퍼토리를 많이 만들어주려는 거죠. 거문고병창이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이 장르로 인해 거문고 연주하는 사람들의 활동 범위가 넓어졌으면 해요.” 


12월, 공연을 앞둔 ‘트로이의 여인’은 가장 힘들어서 잊을 수 없는 공연이기도 하다. 창자에게 감정이입해 눈물을 보이기 일쑤인 그로서는 감정 소모가 너무 많은 무대다. “옹켕센 연출이 소리와 악기 짝을 맞춰주거든요. 한 사람의 개성을 한 악기로 표현하는 콘셉트라서요. 저는 김금미 선배님의 헤큐바와 짝이 됐는데, 강하고 분노에 찬 여성을 거문고로 표현했죠. 김금미 선배님이 우는 만큼 같이 울었어요. 그렇게까지 감정이입하고 눈물 흘리면서 연주한 공연은 없는 것 같아요. 거문고가 원래 점잖은 남자 소리라서, 울어봤자 심봉사 정도였거든요.(웃음)” 


안숙선 명창이 판소리의 이데아 같은 모습으로 극의 중심에 섰던, 손진책 연출의 ‘심청가’ 때는 ‘엄마와 언제 창극단 공연을 또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뭉클했다고. ‘국악 모녀’는 오래도록 한 무대에 서는 게 꿈이다. 팬으로선 고희를 넘어선 안 명창의 건강 관리가 염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엄마는 몸 자체가 악기이니 평소 잘 관리하세요. 아버지께서 아침에 스트레칭하는 것부터 잘 챙겨주시고요. 저희 삼남매는 주말마다 모여서 화목한 모습 보여드리는 게 다죠. 오히려 제가 오래 악기를 즐기는 방법을 체득해야 하는 게 숙제예요.”


40대 중반이 되니 나이를 의식할 때가 잦고, 낼모레 일흔이 되는 스승의 소리를 들으면 그 단단함에 감탄하게 된다. 거문고 연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몸에서 군힘 빼기’다. 그러기 위한 비법을 배우는 게 앞으로의 과제다. 군힘 빼기. 어떤 악기를 연주하든, 어떤 음악을 하든, 아니 어떤 일을 하며 살든 오래 즐길 수 있기 위한 비결이 거기에 있을 것 같다.

 

‘예술가의 초상’을 국립극장 유튜브에서도 만나보세요.
youtube.com/ntong2

 

유주현 ‘중앙SUNDAY’ 공연 담당 기자.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사진 황필주 Studio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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