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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호 Vol.371

그 꿈을 이루기까지

깊이보기 셋 | 음악감독 나실인

음악감독 나실인


‘명색이 아프레걸’은 젠더를 주장하기보다는 마땅한 자유를 누리는 한 인간의 모습을 담았다. 

작곡가 나실인은 그저 한 사람이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그렇기에 조심하고 경계하며, 그 발걸음에 음音을 붙였다

오페라 작곡가를 꿈꾼 건 30대 초반이었다.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독일 뒤셀도르프 음대에서 공부한 그는 틈만 나면 오페라극장을 찾았다. 공연이 끝나면 대기실로 가서 제작진에게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건넸다. 흔들리던 시절이었다. 오페라를 하고 싶었지만 어디에도 당당히 서 있을 곳이 없었던 시절…. 조금은 서글펐던 날들을 지나 39세가 되자 비로소 첫 오페라 작품을 올릴 수 있었다.

작곡가 나실인은 한국 창작 오페라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창작 오페라 ‘나비의 꿈’ ‘검은 리코더’를 순차적으로 발표했고, 지난해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음악극 ‘극장 앞 독립군’을 올렸다. 코로나19로 어수선한 올해도 국립오페라단 ‘빨간 바지’와 예술의전당 ‘춘향 2020’ 프로덕션에 참여해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현재 가장 왕성히 활동하는 오페라 작곡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그의 출발점은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내 모습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걸까?”에서 비롯된다. 그가 참여한 작품은 한국 사회의 화두와 밀접히 닿아 있다. 21세기 작곡가에게 주어진 과제는 한결 실험적 음악을 고민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음악극에 애정을 쏟아온 나실인에겐 무조음악을 쓸 것인지 조성음악을 쓸 것인지가 중요하진 않다. 음 하나를 쓰더라도 “작품 안에서 어떠한 주제 의식을 구현할 것인지”가 중심에 있을 뿐이다.

지난해 세종문화회관 산하 예술단체 합동공연 ‘극장 앞 독립군’을 통해 김광보 연출가, 고연옥 작가와 먼저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이번 작품도 국립극장 전속단체들이 함께 무대에 서는데.
대개 합동공연은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진행하기가 힘든데, 작년에 좋은 호흡을 나눠서 이번에도 함께하게 됐다.

김광보는 뮤지컬이나 오페라 같은 음악극에서도 명민한 감각을 보이는 연출가인데, 현재 호흡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내가 내 역할만 잘하면 되는 구조여서 좋다. 김광보 연출가와 함께 이번 작품의 목표를 모든 제작진이 전 과정을 즐기도록 하는 것에 두기로 했다. 무엇보다 고연옥 작가가 글을 잘 써줘서 모두가 극에 몰입해 있다. 중심이 잘 잡혀 있으니 전체 진행이 수월한 듯하다. 

그동안 주로 창작 오페라 작업에 몰두해 왔는데, ‘오페라’와 ‘음악극’에서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지.
오페라는 음악이 제일 중요하다. 보통은 작곡가가 결정하는 대로 모든 팀이 따라오는 분위기다. 이번 ‘명색이 아프레걸’은 작업 방식이 독특하다. 작곡가는 곡을 쓰고, 작가는 글을 써서 각 단체에 제안하는 형식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보면 악보와 대본이 각 단체에 놀이터를 제공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특이점은 출연 배우가 창극단원을 비롯한 소리꾼들이라는 점이다. 음악에 한국적 특징이 배어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진 않았나.
압박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는 작품을 만들 때 재미에 중점을 둔다. 예술적이나 기술적으로 뛰어나기보다는, 관객이 와서 그 시간 동안 정신없이 즐기도록 하는 게 가장 큰 목표다. 그런데 국악적인 것에만 신경 쓰다 보면 오히려 재미를 놓칠 것 같더라. 

양악기가 아니라 국악기여서 고민되는 지점도 있었겠다.
이번 공연에 국악기는 악기별로 한 대씩 사용하며, 기타와 드럼 등 밴드도 합세한다. 국악과 밴드가 조화를 이루어 다양한 음악적 즐거움을 줄 것이다.

박남옥 역 김주리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우리말이 주는 언어 미학에 관한 고민이 있었을 텐데, 소리꾼이 우리말을 다루는 방식을 가까이에서 접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확실히 대본을 읽을 때부터 다르더라. 요즘 젊은 연기자들은 띄어쓰기한 문장을 제대로 못 읽는 경우가 많다.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기본 발음이 흐트러질 때도 있고…. 그런데 창극 배우들은 발음이 명확하고 띄어 읽기에 능하다. 정확한 발음을 오랜 시간 몸에 익혀온 분들이어서 한국어 표현력이 최상이다. 특히 창극 배우들의 음역대는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음역대와 비슷해 가사 전달에 좋은 조건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간 오페라 ‘검은 리코더’ ‘빨간 바지’ 등 우리 사회 단면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왔다. 이번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에 관한 이야기다. 현재 한국 사회는 페미니즘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데, 평소 관심 있던 주제인가.
이번 작품을 하면서 ‘여성’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에 집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박남옥은 그냥 ‘영화감독’이었다. 굳이 ‘여성’이라는 단어를 넣어 젠더를 구분하는 걸 덜어내고자 한다. 한 사람이 꿈을 가졌는데, 그 꿈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여주고 싶다. 박남옥은 영화 ‘미망인’을 찍고 주목받았지만 이후 훨씬 어려운 삶을 살았다. 이혼해야 했고, 빚을 갚아야 했고, 더는 영화감독으로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박남옥의 삶이 과연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쉽게 말할 수 없다. 그저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음악가의 사회참여가 비약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많은 음악가가 더는 고립된 예술을 꺼리는 듯하다. 조금 낭만적인 말이기도 한데, 과연 예술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사회가 갈수록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젠더 갈등은 미디어 발전으로 인해 더 두드러지고 있고…. 동시대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마음껏 의견을 표출하고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 같다. 예술가들이 사회에 생각을 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기에 더욱 조심하고 경계하며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

예술가들은 어떤 특정한 문제를 푸는 방식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더 신중해야 하겠고.
한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있고, 그 권리에 관한 것들이 이번 작품에 녹아 있다. 특히 1990년대 많은 작품을 보면 젠더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당시 다수의 작품에서 여성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폭력적 부분들이 보인다. ‘명색이 아프레걸’은 젠더를 주장하기보다는 마땅한 자유를 누리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 있다. 무심히 다루려 하지 않았고, 조심하고 경계하며 만들어진 작품이다. 

박남옥이 앞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네 음이 순차적으로 상행하는 걸로 표현했던데.
중간중간 그 모티프가 나오면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이 선율이 나중에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면 좋겠다.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 후 음을 붙이는 작곡 방식을 취하나. 작업 방식이 궁금하다.
나는 선율 다루는 걸 좋아한다. 고전과 낭만 시대에는 선율을 잘 쓰는 것이 작곡가의 미덕이었다. 현대사회에 올수록 음향이나 소음 등 활용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작곡가들이 자각했다. 그런데 나 같은 경우는 발레 음악을 작업하던 중 선율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지하게 됐다. 발레 작품에는 가사가 없는데 무용수들이 어떻게 스토리를 따라가는지 궁금했다. 살펴보니 선율을 외우더라. 음이 점이라면 선율은 점과 점을 연결하는 것이다. 음악에서 선율은 정말 중요하다. 

이번 작품 공연을 앞두고 가장 기대되는 점은.
함께 참여하는 모든 예술가가 즐기는 장이 되기를! 이번 작품은 기존에 있던 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걸 한다는 것만으로도 불편함이 생기기도 한다. 이 작품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야 하는 거니까….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이 작품을 충분히 즐기길 바란다.

글 장혜선 ‘월간객석’ 기자. 바른 시선으로 무대를 영원히 기록하는 사람이 되고자 부단히 글을 쓴다
사진 황필주 STUDIO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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