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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호 Vol.371

비극의 카타르시스, 창극의 한이 만났을 때

미리보기 하나 |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트로이의 여인들 : 콘서트'


불필요한 음악적 요소를 모두 걷어냈다. 오직 소리로 울고 웃기는 판소리. 그 미니멀리즘에 대한 오마주

흥부전·심청전 같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통적 1인극 판소리를 재료 삼아 극장 예술로 확장한 창극이 새로운 관객을 맞으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2010년대 들어 국립창극단이 해온 수많은 실험은 이런 질문에서 비롯됐다. 소리와 현대 연극을 만나게 한 ‘장화홍련’을 시작으로, 사설만 남고 가락이 유실된 ‘변강쇠가’를 부활시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창극을 오페라화한 ‘오르페오전’ 등 내놓는 신작마다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화제몰이를 하며 호평을 받아왔다. 

그런데 국립창극단원들에게 그동안의 공연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실험을 물으면, 거의 예외 없이 ‘트로이의 여인들’을 꼽는다. 우선 “가장 힘들었던 공연이라서”다. 110분에 이르는 공연 시간이 오직 여인들의 한 맺힌 울부짖음으로 점철되는 ‘감정 소모의 끝판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끌어내는 작품”이라서가 가장 큰 이유다. 

‘트로이의 여인들’이 대체 어떤 무대이길래 이런 평을 받을까. 2016년 국립극장과 싱가포르예술축제가 공동 제작한 작품인 ‘트로이의 여인들’은 싱가포르 출신의 세계적 연출가 옹켕센이 지휘봉을 잡고 극작가 배삼식의 대본을 바탕으로 명창 안숙선이 작창을, 전방위 뮤지션 정재일이 작곡과 음악감독을 맡았다. 그뿐 아니다. 세계적 거장 로버트 윌슨의 조명 디자이너 스콧 질린스키, 브로드웨이에서 각광받는 영상 디자이너 오스틴 스위처, 재미 무대미술가 조명희 등 명실공히 ‘국내외 드림팀’을 꾸려 만든 무대는 초연 당시 객석점유율 90퍼센트를 넘어서며 화제를 모았고, 2017년 싱가포르예술축제를 비롯해 2018년 영국·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유럽 3개국 투어에서 기립박수를 받으며 전 세계 대중으로부터 호평받았다.

원작인 그리스비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 전쟁 3부작’의 완결편으로, 트로이가 스파르타와 그리스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망한 날 트로이의 모든 여인이 그리스 노예로 끌려가기 직전 몇 시간 동안에 벌어지는 이야기다. 국립창극단은 이미 2013년 서재형 연출의 ‘메디아’를 선보인 바 있으니, 그리스비극이라 특별한 건 아니다. 관람 포인트는 분명하다. 대표작 ‘리어’ ‘리처드 3세’ 등 서양 고전에 경극·가부키 같은 동양의 다양한 무대예술 양식미를 덧입혀 스타일리시한 미장센을 창조해 내는 것으로 정평 난 옹켕센 연출이 우리 창극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다. 

옹켕센은 평소 판소리를 흠모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초연 당시 제작 발표회에서 “창극의 중심이 되는 판소리는 한국만의 것이 아닌, 세계의 보편적인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판소리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음악이라는 것을 들려주고 싶다”던 그는 창극의 바탕이자 핵심인 판소리를 부각하기 위해 불필요한 음악적 요소들을 걷어내고 소리에 집중하는 콘셉트를 국립창극단에 먼저 제안했고, 실제 무대도 강렬한 소리의 향연으로 꾸몄다.

뮤지컬로 치면 성스루 뮤지컬이랄까. 여러 창자가 등장하는 극이지만 대사를 주고받는 스토리 전개도 거의 없다. 한 명의 창자가 북장단 하나에 의지해 시공간을 넘나들며 눈물과 웃음의 서사를 완성하는 판소리의 미니멀리즘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왕비 헤큐바 역을 맡은 김금미를 비롯해 딸 카산드라 역의 이소연, 며느리 안드로마케 역의 김지숙, 그리고 전쟁의 원흉이 된 헬레네 역의 김준수가 차례차례 나와 자신의 사연과 심정을 노래하는 형식은 마치 각기 개성이 뚜렷한 소리꾼들이 벌이는 배틀과도 같다. 

시작부터 끝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는 여자 소리꾼 8명 또한 이 공연의 또다른 주인공이다. 국내 최고의 판소리 예인 집단이지만 솔리스트로서의 매력을 드러낼 기회가 적었던 국립창극단원들이 쌓인 내공을 맘껏 발산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국악기의 존재감도 상당하다. 창극에서 통상 숨어 있는 악사들이 전면에 자리 잡고, 헤큐바와 거문고, 카산드라와 대금, 안드로마케와 아쟁 등 주인공과 악기가 하나씩 짝을 이뤄 캐릭터의 성격을 대변하는 동시에 악기 고유의 매력까지 당당히 주장한다.


그리스비극이 창과 만나 벌이는 소리 배틀 
소리 본연의 멋과 더불어 옹켕센 특유의 강렬한 미장센도 지극히 감각적인 무대를 완성한다. 큰 창이 뚫린 거대한 성벽 앞으로 터널 형태의 새하얀 파빌리온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극도로 미니멀한 세트이지만, 바다와 창공·우주·용광로 속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역동적 영상을 투영해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굴곡을 마치 표현주의 회화처럼 스펙터클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2시간에 가까운 공연 시간 내내 여자들의 한 맺힌 소리가 줄줄이 이어지는 구성이 다소 지루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옹켕센은 미소년 이미지의 ‘창극계 아이돌’ 김준수를 절세 미녀 헬레네로 둔갑시켜 눈길을 끌었다. 헬레네의 소리를 받쳐주는 음악도 반전 요소다. 유일하게 국악기가 아니라 서정적 피아노 반주에 얹힌 헬레네의 소리는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미의 화신에게 남성과 여성 사이, 동양과 서양 사이의 이중성을 부여하는 것은 서구적 미의 기준에 대한 도발이나 다름 없다. 현대음악으로 판소리를 받쳐 줘 세계에 선보일 새로운 창극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여하는 흥미로운 장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트로이의 여인들’이 가장 강렬한 작품이 된 것이 이런 형식 면에서 독특하다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기실 전통을 재해석하는 코드를 동서양의 만남으로 접근하는 방식 자체는 새롭지 않다. 그리스비극답게 감정을 다 쏟아내는 데서 생성되는 카타르시스에 주목할 만하다. 슬픔을 절제하는 것이 한국적이라고 봤을 때, 슬픔의 강도가 통상적인 소리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는다. 실제로 헤큐바 김금미와 짝을 이룬 거문고 주자 최영훈은 “그전에는 울어봤자 심봉사 정도였지, 이렇게까지 감정을 이입해 눈물 흘리면서 한 공연은 없었다”라고 고백했다. 옹켕센은 장엄한 스케일로 인간 본성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보는 이의 감정까지 발산시키는 그리스비극 특유의 매력이 우리 소리의 ‘한’과 만날 때 시너지가 폭발할 수 있음을 간파한 것 아닐까.

이번 공연은 국내에서는 2017년 공연 이후 3년 만에 선보이는 무대다. 어려운 시국에 옹켕센이 직접 내한해 완성도를 더했다. 공연 마지막 날인 12월 12일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트로이의 여인들 : 콘서트’도 주목된다. 극적인 요소를 걷어내고 편곡을 새로 해, 초연 당시 도창 ‘고혼’으로 출연한 안숙선 명창이 작창한 소리의 깊이를 살린 창극 음악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색다른 무대로 꾸민다. 무대미술가 여신동이 콘셉트와 연출을 맡고, 정재일 음악감독이 직접 피아노 연주자로 출연해 음악을 이끌 예정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코러스로 등장하는 ‘여인들’을 중심으로 음악을 구성해 콘서트에 특별함을 더했다. 창극에서 ‘고혼’이 노래하는 곡들을 ‘여인들’이 부르도록 한 것이다. 극의 중심에 서는 헤큐바·카산드라·안드로마케·헬레네의 솔로곡들은 압축하고, 정미정·허애선·나윤영·이연주·김미진·서정금·민은경·조유아 등 이름 없는 ‘여인들’이 전면에 부각된다. 이들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파트를 나누어 부르며 펼쳐낼 진짜 ‘소리 배틀’ 한바탕에 귀 기울여보자.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2020년 12월 3~10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R석 5만 원 S석 3만5천 원 A석 2만 원

‘트로이의 여인들 : 콘서트’
2020년 12월 12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R석 4만 원 S석 3만 원

02-2280-4114


글 유주현 ‘중앙SUNDAY’ 공연 담당 기자.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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