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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호 Vol.371

아버지의 기쁨과 슬픔

다시보기 둘 | 국립창극단 '아비. 방연'


그럼에도 방연의 삶은 꿋꿋이 계속되어야 한다. 아비라는 이름으로 


방연은 왜 고통받아야 하는가. 유배된 어린 왕 단종에게 사약을 전달하기 위해 괴로운 마음으로 밤낮없이 달리고, 귀한 딸 소사를 지키기 위해 다시 죽도록 달리지만 일은 결코 그가 바란 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어디 세상사 뜻대로 되겠느냐만, 운명은 방연에게 특히나 더 가혹하다. 그저 모든 일에 마음을 쏟아가며 성심으로 살아왔을 뿐인데 그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차고야 만다. 그럼에도 방연의 삶은 꿋꿋이 계속되어야 한다. 아비라는 이름으로. 


첩첩산중에서
소란한 정계에서는 연일 둥둥거리는 북소리와 함께 “충忠!”이라는 힘찬 외침이 들려온다. 벼락처럼 온몸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듯한 이 소리는 충심이 곧 생사를 좌우하는 상황을 상징한다. 수양대군에게 부당하게 왕위를 뺏긴 단종의 복귀를 바라는 이들은 역적으로 몰리고, 수양대군에게 충성하며 새 흐름에 몸을 던지는 자들은 권력의 핵심부에 파고들며 조선의 판도를 크게 뒤흔든다. 단종을 성심껏 모시던 방연 역시 안전한 상황이 아님에도 꼿꼿한 그는 섣불리 “충!”을 외치지 않는다.  

방연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창극 ‘아비. 방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물이 처한 상황에 완전히 몰입하며 그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이었을 테다. 극 초반부를 잔뜩 메운 이 강렬한 소리, ‘충’과 더불어 순식간에 관객을 역사의 한 장면으로 불러들인 것은 ‘아비. 방연’의 선명한 캐릭터, 그리고 그 혼란한 세상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것 같은 왕방연(최호성)·단종(민은경)·수양대군(김준수)·한명회(이시웅), 극과 관객의 중간 지대에서 이야기의 사공 역할을 하던 도창(김금미)이었다. 초반부터 기세를 몰아간 첫 장면의 소리와 연기는 관객을 눈 깜짝할 사이에 방연의 마음속으로 데려다 놓았다. 

단종을 향한 왕방연의 충심은 여전했으나 당장 별다른 도리는 없었다.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이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처연하게 노래하는 단종에게 방연은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송구한 마음, 전할 길 없습니다”라고 절절하게 노래하고, 결국 수양대군 세력의 바람대로 단종을 영월의 유배길로 모신다. 하지만 도성엔 여전히 피바람이 불고, 방연의 충심은 새 세력에 눈엣가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연을 손쉽게 쥐락펴락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방연의 소중한 딸 소사였다. 


소사의 아비, 주군의 신하
‘아비. 방연’에서 가장 정제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티끌 하나 없는 듯한 창을 선보인 것은 바로 소사(박지현)였다. 방연이 홀로 금쪽같이 키워온 소사는 매번 놀라울 정도로 구구절절 옳은 말만을 노래했다. 자신의 왕을 보내야만 했던 왕방연의 애절한 목소리가 마음을 거칠고 무겁게 짓누르며 관객의 심정도 함께 애끓게 했다면, 소사의 맑은 목소리는 모진 풍파로부터 도리어 방연을 지켜주는 듯했다.

혼란한 시국에도 인생의 대소사는 벌어지는 법.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사의 혼삿날이 찾아왔다. 기쁨 말고는 끼어들 틈이 없는 잔치 속에서 소사와 송석동(이광복)이 혼례를 올렸고, 가장 화려한 무대와 풍요로운 음악이 즐거움을 더했다. 애정과 감사와 소망이 가득한 소리가 서로 오가며 극이 행복의 절정에 치달으려 했으나 잔인한 운명은 방연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소사의 신랑이 반역죄로 잡혀가고, 결혼식의 장막이 거둬지며, 반역죄인들의 시체가 무대 위에 다시 세워지자, 왕을 잃은 방연의 마음은 딸까지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처참히 무너졌다.

소사와 단종이라는 선하고 여린 이들을 만났을 때 방연의 마음은 잠시나마 평안을 얻었고, 다시 위험천만한 세계에 뛰어들 때는 뒤숭숭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극의 흐름과 시종일관 긴밀하게 호흡하며 아니리와 발림 사이를 촘촘히 메워나가던 황호준의 음악은 이 여러 세계 속에서 갈등하는 방연의 마음을 한시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잡아냈다. 여러 인물의 이해관계가 교차하고, 그 갈등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하는 왕방연의 복잡다단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음악은 빠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죄스러운 마음으로 무릎을 꿇어야 하는 단종, 방연이 최대한의 사랑으로 업어 키워야 하는 소사. 방연의 마음은 그 둘 모두를 향해 있었다. 두 인물을 향한 방연의 사랑은 거의 거스를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었다. 수양대군의 측근은 둘 중 하나를 택하라 강요했다. 왕에 대한 신의와 가족에 대한 책임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엉엉 울던 방연은 결국 아비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소사를 살리기 위해 충신의 일가족과 왕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눈물을 머금고 딸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돌아오지만 결국 소사에게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다. 소사의 총명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잔뜩 움츠러든 어린아이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최선을 다해 달리고 또 달렸지만 아비의 본분을 다하지도, 자신의 주군도 지키지 못한 그에게 남은 것은 땀방울과 눈물뿐이다. 

이 비극의 클라이맥스에 극을 에워싼 음악, 그리고 도창과 방연의 소리는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난다. 극을 한껏 고조시킨 뒤 쩌렁쩌렁 울려야 할 소리를 위해 자리를 내주는 음악은 야속하리만큼 절묘하고 멋지다.

방연, 아비의 삶
방연이 짊어진 최대치의 불행을 본다. 비록 나이는 어릴지언정 그가 아버지처럼 모셨을 그의 주군 단종, 그리고 그가 누구보다 귀하고 소중히 키운 딸 소사. 맑고 고운 목소리를 가진 이들이 숨을 잃고 총명함을 잃는 과정을 똑똑히 목도한 그의 고통을 가늠해 본다. 어디까지 사람이 고통받을 수 있을지 시험하는 듯한 이 가혹한 이야기에 휘청이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노래하며 꺼이꺼이 울고, 웃고, 분노하고, 괴로워하고, 고군분투하던 방연의 행적을 뒤따라간 많은 이들은 자신도 아비가 되어 흐르는 눈물을 조용히 닦았을 것이다. 

쏟아지는 비극과 슬픔 속에서 그는 소사를 업고 아비의 모습으로 퇴장한다. 수양대군마저 괴로움에 시달리며 아무도 방연을 찾지 말라 명한다. 스스로의 탄생과 사망을 역사에서 지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소사와 자신의 상처를 달래며 조용히 살아가기로 결정한 방연의 마음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복잡한 심경이 되고야 마는 ‘아버지’란 말에는 다 헤아릴 수 없는 삶의 무게가 배어 있는 것만 같다. 때로 세상은 암암리에 아버지에게 많은 것을 감내하고 희생하라고 요구한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라는 이름은 늘 모자란 사랑과 함께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이 세상 부모가 겪는 기쁨과 슬픔이 무엇이길래 우리는 이 이름들을 이렇게 무겁게 받아들일까. 부모의 삶은 언제나 이런 괴로운 선택의 연속일까. 방연은 슬픔 속에서도 기쁨의 순간을 끝끝내 다시 찾아내고야 말았을까. 방연의 삶을 통해 잠시나마 아비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국립창극단 ‘아비. 방연’

2020년 10월 30일~11월 8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신예슬 음악 비평가, 헤테로포니 동인. 유럽 음악과 근래의 음악에 관한 의문으로 비평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음악의 사물들: 악보, 자동 악기, 음반’(2019)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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