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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7월호 Vol.342

국립국악관현악단 강주희

예술가의 초상

 

 

장단이 빨라지며 음악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각 악기가 서로 하모니를 이루고 리듬이 춤을 추자 어느새 그 위로 ‘탁’ 올라타는 호기로운 바람 소리. 태평소, 아니 강주희의 등장이다.


6월의 첫날,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된 국립국악관현악단 ‘베스트 컬렉션Ⅳ-박범훈’은 여러모로 의미가 남달랐다. 박범훈 초대 단장이 오랜만에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호흡을 맞췄다는 점, 그리고 관현악단이 그간 근거지로 삼았던 해오름극장을 떠나 다른 극장에서 정기연주회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번 시즌에 내건 ‘움직이는 국립극장’이라는 표어처럼 국립극장 전속단체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은 중구 장충동을 벗어나 각지에서 관객을 만나고 있다. 명실상부 클래식 음악의 전당에 들어선 국립국악관현악단은 무대는 물론 합창석까지 가득 채우며 오늘날 국악관현악의 뜨거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이날 무대의 첫 곡으로는 박범훈의 ‘오케스트라 아시아를 위한 뱃노래’가 연주됐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전해인 1994년 한··일 민족악단 ‘오케스트라 아시아’의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돛을 올리고 항해를 떠나는 풍경과 진취적 기상이 돋보이는 곡이다. 나각과 나발이 시작을 알리자 관악기의 바람 소리가 시원하게 무대를 가르며 뻗어나갔다. 선장의 손짓을 따라 위풍당당하게 뱃머리를 이끈 건, 지휘자와 마주 선 강주희의 태평소였다.


“‘오케스트라 아시아를 위한 뱃노래’는 박범훈 선생님이 작곡한 국악관현악 대표 레퍼토리잖아요. 무대를 여는 의미를 담아 직접 연출하신 장면이었어요. 워낙 울림이 좋은 공간이라 일어서서 연주한 효과가 있었던 것 같네요.”


국립국악관현악단 무대에서 그녀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강주희는 국악관현악에서 대부분 한 대만 배치하는 태평소를 주로 맡아왔다. 리듬이 고조되다 절정에 다다를 즈음 존재감을 드러내는 악기.


“태평소에 애정이 많아요. 엄청난 음량을 자랑하는 데다 독보적인 소리를 지녔잖아요. 국악관현악에서 태평소는 곡의 클라이맥스나 웅장함을 표현해야 할 때 주로 등장해요. 흘러가는 장단 위에 구름을 ‘탁’ 올라타고 등장하는 느낌이랄까요. 연주하다 보면 찌릿찌릿할 때가 많아요. 이런 맛에 태평소 하는구나 싶죠. 다만 실수하면 엄청 티가 나고, 잘해도 본전이지만요.(웃음) 그렇지만 매력 넘치는 악기예요. 노력한 것이 온전히 연주로 드러나거든요.”


피리 연주자들은 구조와 주법이 유사한 생황·태평소·대피리 등 악기를 여럿 겸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성이 다른 악기라면 모를까, 실제 무대에서 서로 다른 악기를 수시로 바꿔 들며 연주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터. 강주희는 수석이 된 후에도 태평소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어릴 적 피아노도 배웠고, 노래하는 것도 참 좋아했어요. 예술 하는 사람들 중에 안 그런 이가 있을까 싶지만요. 노래 잘한다고 반에서 뽑혀서 경연대회에 나가기도 했죠. 유년 시절을 음악과 가깝게 지낸 것 같아요.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로 국악을 접하게 됐는데, 문득 나는 이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국악이 한국음악이라는 걸 몰랐어요. 여러 가지 음악 중 한 종류인 줄 알았죠. 피아노나 성악 같은 건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하고 있지만 국악은 상대적으로 연주자가 많지 않으니까 오히려 더 흥미가 생겼어요. ‘많이들 안 하니까 내가 한번 해볼까?’ 제가 호기심이 많거든요. 그렇게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서 피리를 전공하게 됐어요. 악기가 무척 작은데 이렇게나 큰 소리가 나다니… 신기하고 매력적이었어요. 근데 연주하니까 이렇게 힘들 수가 없네요.(웃음)”


고등학교 시절 이용탁에게 피리를 배운 그녀는 졸업 후 중앙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에선 경기시나위 가락이 스며있는 박범훈류와 남도음악 선율을 담은 서용석류를 모두 배웠다. 그렇게 학창 시절을 지나는 동안 자연스레 마음속에 국립국악관현악단 입단을 목표로 두게 됐다.


“은사인 이용탁 선생님이 국립국악관현악단 피리 수석이셨거든요. 관현악단에 계실 적에 선생님께 피리를 배웠어요. 당시 박범훈 선생님이 단장을 맡고 계셨고요.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음악이 너무 좋았어요. 국립극장은 꿈의 직장이었죠. 그러고 나서 이용탁 선생님이 부지휘자로 연습실에 다시 오셨으니, 정말 감개무량하더라고요.”

 

작곡가의 악보에 연주자가 덧쓰다
강주희는 대학을 마치고 2003년 연수단원으로 입단해 2004년 정단원이 됐다. 김민아(피리)·김병성(대금)이 입단 동기다. 15년간 국립국악관현악단에 재직하면서 네 명의 예술감독을 거쳤고, 부수석을 맡는 등 자신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확장해왔다.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기간이지만 연배로 따지면 여전히 피리 파트에선 막내 라인이다. 그렇기에 수석 임명 소식을 들었을 때 부담이 앞선 것도 사실이다.


그녀가 국립국악관현악단에 몸담은 2000년대 초는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고속도로에 갓 진입한 관현악단은 속도를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초기 예술감독과 함께 개간한 땅에 창작을 위한 다양한 실험의 씨앗을 뿌렸다. ‘국악’의 일부로 간주되던 국악관현악이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껴안으며 몸집을 키워나갔다.


“네 분의 예술감독 모두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황병기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국악관현악의 길과 가능성을 활짝 열어주신 것 같아요. 그 시기에 국악관현악이 굉장히 다채로워졌거든요. 규모·성격·연주 기법 등 여러 방면으로요. 그전까지 ‘국악관현악’이라는 견고한 장르의 틀 안에서 성장했다면, 이때부터는 현대음악적으로 많은 시도가 이뤄졌죠. 가끔 단원들과 그때가 ‘국악관현악의 춘추전국시대’였다고 이야기하곤 해요. 당시에 부수석으로 태평소를 자주 잡았는데, 현대음악적인 시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느라 무척 힘들었어요. 대신 다양한 것을 접하고 시도해보면서 음악적으로 성숙해졌고, 연주자로서 ‘나’는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습니다. 이때를 시작으로 국립국악관현악단뿐 아니라 모든 국악관현악단의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고 생각해요. 물론 ‘국립’이 가장 큰 역할을 했고요.”


국악관현악과 함께 걸어온 시간 속에서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지금도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창작음악이다. 단순히 오늘의 음악이라서가 아니다. 작곡가의 악보에 연주자가 기표를 덧쓸 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창작음악의 매력은 ‘해석’에 있어요. 전통음악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스스로 갈고닦아서 내공을 쌓는 작업이라면, 창작음악은 전통의 어법 안에서 만들어진 악보와 작곡가의 노트가 있고, 연주자에겐 해석의 여지가 주어지죠. 연주자로선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작업이잖아요. 처음 피리를 택한 것도 도전이었고, 창작음악을 연주하는 것도 일종의 도전 의식이에요.”


강주희는 2012년 국립극장 예술가시리즈 ‘피리, 셋(Set)’ 무대에서 같은 파트의 김민아·최훈정과 호흡을 맞췄다. 피리 연주자 셋이 만나 피리·생황·태평소·장새납 등 관악기로 만들어낼 수 있는 다채로운 3중주를 시도한 것. 2014년 10월, 좋은 밤 콘서트 ‘야호’ 무대에선 국악관현악 연주를 배경으로 트럼펫 연주자 최진현과 나란히 서서 태평소를 연주했다. “태평소와 트럼펫이 마치 대결하듯이 자신의 연주를 자랑하는 동시에 동서양의 악기가 이렇게 교차할 수 있음”을 보여준 무대라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그뿐만 아니라 울산시립교향악단·조이 오브 스트링스 등 오케스트라와도 꾸준히 협연하고 있다. 이런 무대에 오를 때마다 그녀는 오늘날 국악관현악이 살아남기 위한 돌파구는 무엇일지 곱씹어보곤 한다.


“지금까지 국악관현악에서 수많은 시도가 이뤄졌지만 일회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새로운 작품이 계속 연주되고, 명곡으로 남아야 하는데 말이죠. 실험적인 것도 좋지만, 대중성을 보완해서 듣기 좋고 우리 정서에 맞는 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또 지금의 국악관현악이 마이크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롯데콘서트홀이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등 콘서트 전용 홀에서 공연해보니 환경적으로 음향을 보완해 마이크 사용을 점차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해결할 과제가 많으니 꾸준히 노력해야겠죠.”


모두가 안고 있는 국악관현악의 고민은 큰 그림이 아니라 오히려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열망과 포부로 풀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달성하기보다는 파트의 화합, 관현악단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한다는 ‘젊은 수석’은 어떤 포부를 품고 있을까.


“고민이 많아요. 어릴 때는 무조건 할 수 있다고 외쳤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어떤 음악을 잘할 수 있고 어떤 음악을 해야 하는지 생각이 끊이질 않네요. 하고 싶은 음악은 많지만, 무엇보다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좋은 음악을 위해 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데… 아직 답을 내리진 못했어요.”

 

김태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무용이론을 공부하고 있다. 월간 ‘객석’과 서울문화재단·국립극장에서 잡지를 만들었으며,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제12회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사진 전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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