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를 그만두면 세상이 무너지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쪽 문이 닫히니 곧 새로운 문이 열렸다.
동시대의 물결을 타고 오늘의 한국춤이 그에게 손을 건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연의 흥망이 나에게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느낀다.”
한 인터넷신문에 실린 어느 무용수의 자전적 에세이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몇몇 단어에서 깨달음과 일말의 체념이 느껴진다. 한편으론 무언가 꿋꿋한 심지를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평범하지 않은 길을 헤쳐온 무용수는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야 이를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결국 새드 엔딩일까?
국립무용단 입단 10년 차 김병조를 소개할 때면 여전히 ‘발레’가 전제로 따라붙는다. “전공을 바꾸고” “국립발레단과 국립무용단을 모두 경험한”. ‘무용’이라는 큰 범주로 묶을 수 있다 해도 사실 발레와 한국춤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끊임없이 직선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발레의 엘레바시옹과 곡선을 그리며 뿌리고 거두는 한국춤의 호흡은 목표하는 지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알기에, 그가 발레를 하다 대학에서 전공을 바꿔 국립무용단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저 흔치 않은 경우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김병조는 어린 시절 자신에 대해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었던 장난꾸러기’로 기억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어머니의 추천으로 발레 학원에 나갔지만, 그마저 한 달 하고 그만뒀다고.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대학을 목표로 삼자 스스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필사적인 마음이었다. 세상 사람들 보란 듯이 잘해내고 싶었던 것이다.
“발레가 너무 좋았어요. 대학 시절에 비디오 돌려보는 게 유행이었는데요. 비디오테이프를 사다가 여성 무용수가 춤추는 장면은 잘라내고 남자 솔로 바리아시옹만 이어 붙인 다음에 수없이 돌려봤어요. 바르시니코프·무하메도프에게 열광하던 세대인데, 저는 그중에서도 파루흐 루지마토브를 참 좋아했죠. 그가 춤추는 영상을 하루 100번 이상 돌려본 것 같아요. 남들이 게임에 빠질 때, 저는 발레에 푹 빠졌죠.”
대학 1학년이던 2001년, 국립발레단 무대에 객원 무용수로 출연할 기회가 찾아왔다. 김병조는 선배·동기들과 함께 남자 귀족 역할로 공연에 참여했다. 처음 경험한 국립발레단 무대는 눈부시리만큼 아름다웠다. 발레단에서 인생을 보낼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던 중에 연수단원 선발 공고가 났고, 이에 합격해 1년간 발레단에서 활동했다. 2000년을 기해 국립발레단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주 무대로 정착하면서 재단법인으로 독립했고, 1996년 취임해 2001년까지 단체에 새바람을 일으킨 최태지 단장이 당시 유리 그리고로비치 3부작─‘스파르타쿠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러시아 볼쇼이극장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던 시기였다. 김병조는 짧은 시간이지만 국립발레단의 변혁을 생생하게 경험했고, 이는 잊지 못할 애정 어린 기억으로 남았다.
“2002년으로 넘어가던 때, 선택의 기로에 섰죠. 병역 특례를 위해 콩쿠르를 준비하느냐, 아니면 군에 입대하느냐. 당시 한 선배가 오랫동안 콩쿠르를 준비했음에도 수상에 실패해 결국 입대하는 걸 보고 차라리 병역을 빨리 마치고 다시 춤추자고 생각했어요. 2002년 1월 입대했고, 곧 그 결정을 후회했죠. 병장 때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어요. 전역이 얼마 남지 않은 터라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군대를 나와서 재활에 들어갔는데, 잘 낫질 않는 거예요. 2년 2개월 군 생활로 근육은 완전히 바뀌었고, 학교에 돌아가 보니 후배들 실력은 너무 뛰어나고… 발레리노로 살아가는 게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으로 무용을 그만둘까 고민했죠.”
그 지점에서 김병조는 자신에게 “무대를 떠나서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몇 번을 생각해도 답은 “노”였다. 그런데 힘겨운 시간 중에도 자꾸만 옆 연습실이 눈에 들어왔다. 신명 나게 북을 두드리고 역동적으로 뛰어오르던 한국무용 연습실. 고민하고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과 대비되는, 에너지를 쏟아붓고 땀을 진탕 흘리며 나서던 남학생들의 모습. 인생의 전부이던 발레를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발레를 그만두면 세상이 무너지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한쪽 문이 닫히자 새로운 문이 열렸다.
언저리에서, 감싸 안으며
대학에서 한국무용을 시작한 그는 졸업 후 국수호 디딤무용단에서 활동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무대에 오르던 날들이었다.
“하늘극장에서 ‘천무’라는 공연을 할 때였어요. 황용천·송설과 함께 리허설을 마치고 쉬고 있는데, 대형버스 두 대가 극장으로 들어오더라고요. 국립무용단 선배님들이었어요. 팬들이 아이돌더러 ‘자체발광’ 한다는 표현을 쓰잖아요. 그들을 보고 있는 제 마음이 딱 그랬어요. 격이 다른 멋이 있더라고요.”
머지않아 2009년, 김병조는 황용천·송지영과 함께 연수단원으로 국립무용단에 발을 들이게 된다. 2년 뒤엔 정단원 시험을 치러 당당히 입성했다. 순탄치 않은 그의 지난날을 듣던 나는 갑자기 궁금증이 들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벅찬 시간, 선택의 대가를 치르고 힘든 시간을 견딘 그의 표정은 어찌 이리 밝기만 할까.
“힘든 게 왜 없었겠어요. 한국무용으로 전향한 후로 발레 전공자 꼬리표를 너무나 떼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제 춤을 보면서 ‘쟤 발레하던 애라서 저래’ 하는 고정관념을 갖는 게 싫었거든요. 그런 시선들이 저를 더 달리게 한 것 같아요. 또, 다행인 것은 입단 당시 단장이셨던 배정혜 선생님의 춤 스타일이 전통만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Soul, 해바라기’(2006) 같은 대표작도 재즈 음악에 한국춤을 조합한 ‘한국적 모더니즘’이잖아요. 제가 매우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한데, 이 작품을 출 때는 크게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어요. 그리고 고맙게도 동기들이 참 많이 도와줬고요. 물론 여전히 전통이나 민속을 할 때는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다진 호흡이 다르다 보니까 저는 많은 부분을 머리로 생각하면서 춤추거든요. 춤 잘 추는 이들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버릇도 그래서 생긴 것 같아요. 국립무용단에 걸맞은 춤을 추기 위해서 남들보다 최소 두 배는 신경 써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때때로 나는 국립무용단에서 그의 존재가 작게 쏘아 올린 신호탄 같다는 생각을 한다. ‘국립’의 사명을 안고 50년 넘는 역사를 관통한 예술단체이니 그 문턱이 결코 낮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안에서 많은 이들과 사뭇 다른 이력을 지닌 김병조라는 존재는 여러 면에서 도드라졌을 터다. 그러나 다름이 둥글게 다듬어질지언정 뭉텅 깎여나가지 않고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동시대의 물결 앞에서 오늘의 한국춤이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암시한다는 생각이다. 김병조 또한 자신이 지금에 이른 것은 ‘시대를 잘 탄 덕분’이라고 덧붙였다. 시대는 힘차게 물결쳐 국립무용단에 해외 안무가와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를 들여놓았다. 그 거센 물결을 타고 김병조의 춤은 더욱 넘실거린다.
지난 2017-2018 시즌, 그는 시즌 개막작 ‘춘상’(안무 배정혜·연출 정구호, 2017)에서 공식적으로 주역 데뷔를 치렀다. ‘맨 메이드’(안무 신창호, 2018)에선 조안무를 맡는 동시에 자신의 색깔을 무대에 짙게 드러냈다. 특히 박소영 단원과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은 공연이 끝난 뒤 많은 이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안무가가 춤을 추면서 이야기하는 장면을 구상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춤도 춰야 하고, 머릿속에선 다음에 말할 대사를 생각해야 하고… 쉽지 않았어요. 전체적인 틀은 정해두었지만, 실제 대사는 즉흥적인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매 공연 장면이 조금씩 달라졌어요. 매번 새로운 신을 만드는 기분이었죠. 준비하는 과정에서 박소영 단원과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오늘의 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죠.”
그런가 하면 2018-2019 시즌, 김설진이 참여한 ‘더 룸’(11월 8~10일, 달오름)은 전작과 또 다른 결을 가진 작품이 될 전망이다.
“구분하자면 ‘회오리’와 ‘맨 메이드’를 같은 카테고리로 묶고, 또 다른 카테고리에는 ‘시간의 나이’와 ‘더 룸’을 넣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전자는 기술적으로 보자면 손끝 하나까지 안무가가 제시하는, 즉 안무가의 의도를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구현하는 무용수가 필요한 작품이고요. 후자는 길은 나 있지만 뛰어가든, 걸어가든, 기어가든 무용수에게 자율성이 주어진 작품이죠. ‘더 룸’은 현재 다양한 연령대의 무용수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보는 단계에 있어요. 그동안 국립무용단이 춤 안에서 세부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였다면, 이번에는 무용?연극이라는 장르 구분 자체를 뛰어넘는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최근 김병조는 창작 작업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국립무용단 단원이던 조재혁과 2015년 결성한 휴먼스탕스 아트그룹은 ‘한국적 컨템퍼러리’를 기치로 지금까지 꾸준히 공연을 올리고 있다. 단체의 이름은 ‘휴머니스트(humanist)’와 ‘레지스탕스(resistance)’를 결합해 만들었다. 국립무용단의 중·대규모 작품에서 보여주기 어려운, 사람 냄새 짙은 작품을 만들고 있다. 모토는 안무가도, 무용수도, 관객도 행복한 공연을 만드는 것. 올 초 ‘넥스트 스텝’에서 선보인 그의 안무작 ‘어;린 봄’(2018)과 마찬가지로 창작에서 그가 주요하게 관심을 두는 주제는 ‘사람’과 ‘삶’이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주변의 삶을 살피는 것. 스스로에게 갇히지 않고 언저리를 꾸준히 탐색하는 것. 슈즈를 집어 든 순간부터 지금껏 그가 삶을 살아온 방식이 그렇지 않았나 싶다.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 그 의미를 물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무척 긴장하는 편이거든요.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꼬박 1년간 준비한 무대를 단 한 번 공연하는 자리에서 제가 완벽하고 멋진 춤을 춘다 한들 관객이 여러 이유로 그 공연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반대로, 무대에서 실수를 했지만 관객이 그 작품에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실수도 예술적으로 봐준다면… 공연의 흥망은 과연 제게 달린 걸까요? ‘Soul, 해바라기’ 해외 공연 때 베를린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는 친구를 초대한 적이 있어요. 멋진 무대를 보여주고 싶어서 테크닉을 미친 듯이 연습했죠. 그런데 앞선 장면에서 뿌린 물로 바닥이 젖어 정작 본공연에선 실수를 한 거예요. 너무 실망한 나머지 공연을 마치고 친구를 만나 토로했는데, 정작 친구는 그 장면까지도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과 관객이 보고 싶은 것이 다를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그렇게 생각하니 무대가, 춤이 좀 더 자유로워지더라고요. 무대에 오르는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 그 결과는 운명에 맡기는 거죠.”
글 김태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무용이론을 공부하고 있다. 월간 ‘객석’과 서울문화재단·국립극장에서 잡지를 만들었으며,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제12회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사진 전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