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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호 Vol. 346

거인 황병기, 그를 기억하는 법

리뷰┃국립국악관현악단 '2018 마스터피스-황병기'

군더더기와 과장을 싫어하던 선생의 향기가 음악에 올곧게 담겼다.

음 하나하나에 농축된 집중력과 여운, 황병기의 향기가 추억처럼 묻어 있었다.
2018년 9월 18~19일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피안(彼岸)에서 차안(此岸)으로
올해 1월 31일 피안의 세계로 서둘러 떠난 분이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홀연히 올랐다. 그는 태연히 앉아 ‘침향무’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무대는 그의 향기로 채워진다. 무심한 듯 무념한 듯 다시 나타난 고인의 모습에 객석은 잠시 숙연해진다. 홀로그램 화면으로 등장한 고故 황병기 명인(1936~2018) 때문이다. 그의 ‘침향무’ 연주에 몰입하려 할 즈음,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가야금 연주자들이 명인의 연주를 이어받는다. 이내 수원 소화초등학교 학생 10명이 고사리손으로 연주에 합류한다. ‘침향무’는 어느새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대규모 가야금 합주 음악으로 변모한다. 9월 18일, 첫날 공연 ‘황병기의 실내악’ 끝부분을 마무리하는 풍경이다. 명인의 마스터피스가 어떻게 전승돼야 하는지 상징적으로 전달되는 장면이다.


명인의 음악은 이렇게 국립국악관현악단 ‘2018 마스터피스-황병기’ 무대에 올랐다. ‘침향무’ 외에도 황병기 최초의 가야금 독주곡 ‘숲’(1962)을 비롯해 ‘비단길’(1977), ‘남도환상곡’(1987) 등 주옥같은 창작곡과 김윤덕 명인에게 전수받은 산조를 다듬어 만든 ‘정남희제 황병기류 가야금산조’(2014), 수많은 이야기를 남긴 화제작 ‘미궁’(1975)까지 열두 곡이 첫째 날 연주되었다.

 

 

둘째 날인 9월 19일은 ‘황병기와 관현악’ 공연으로, 아들 황원묵 교수가 대학교 3학년 때 협주곡으로 편곡한 가야금 협주곡 ‘밤의 소리’를 비롯해 황병기가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으로 재직(2006~2011)하던 무렵인 2006·2008·2011년에 각각 위촉한 나효신·임준희·정일련의 관현악곡이 연주됐다. 거기다 황병기의 ‘침향무’를 오마주한 임준희의 ‘심향(心香)’까지 위촉 초연돼 무대가 알뜰하게 채워졌다. 황병기 예술감독 시절 5년간 관현악단의 부지휘자로 호흡을 맞췄던 원영석이 지휘를 맡았다. 피안(彼岸)의 세계로 떠난 고인은 1박 2일, 차안(此岸)을 향한 소풍 길에 오르셨다. 가을 나들이가 즐거우셨기를.

 

남겨진 이들의 숙제
명곡을 엄선해 선보이고자 국립국악관현악단이 ‘2018 마스터피스’ 시리즈를 황병기로 선정한 것은 시의적절한 기획이다. 타계한 지 8개월 지난 이즈음, 그의 음악을 기억하고, 그의 안목을 새기고, 그의 정신을 기리는 시간은 그 의미만큼이나 귀하다. 가야금의 명인·작곡가·교육자·학자 등 여러 역할이 부여된 황병기의 명곡을 만나고, 그의 안목이 투영되어 이룩한 음악의 결실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다. 첫째 날 무대에 오른 연주자 대부분은 그의 제자들이다. 그들의 가야금 소리에 고인의 숨결이 더해져 새 생명을 얻은 듯했다. 황병기의 다양한 음악언어를 보여주기 위해 엄선한 12곡을 ‘관조의 길목에서’(미궁·산운·달하노피곰), ‘심연으로의 여정’(숲·비단길·하마단), ‘피안의 나날들’(춘설·남도환상곡·정남희제 황병기류 가야금산조), ‘보석빛 찬가’(고향의 달·시계탑), ‘환희의 구가’(침향무)의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 연출은 가상하다. 그 덕에 황병기의 음악 세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압축적으로 전달되었다.


하지만 황병기의 ‘마스터피스’라 평가할만한 곡 대부분이 가야금독주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은 18일 공연의 명과 암(明暗)이었다. 그의 인생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이듯, 가야금 음악을 집중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은 흔한 기회가 아니니 더없는 호기였다. 그의 가야금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시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깊은 밤 가야금소리’처럼 고즈넉한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울리는 가야금 음향이 아닌, 확성 장치를 통해 듣는 반복된 가야금 소리는 듣는 이에게 다소 음악적 피로감을 안겨주었다. 가야금 음색의 따뜻한 질감은 사라지고 연주자들이 지닌 저마다의 음악적 개성은 충실히 전달되지 않았다. 고인의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따사로운 가야금 소리는 획일화된 확성 장치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공연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게 느껴진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조명의 과도함은 음악에 대한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데 일조했다. 그의 가야금 음악이 어떠한 공간에서 어떻게 연주되고 재해석되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몫임을 인식하는 시간이었다.

 

명인의 지향을 담은 관현악
안고수비(眼高手卑)라는 말이 있다. 눈은 높지만 손(실력)은 낮다는 말이다. 그러나 황병기는 ‘안고수고(眼高手高)’하다. 고수(高手)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당신께서 눈과 손이 높으니 진정한 예술가를 알아보는 안목도 뛰어날밖에. 그는 2006년부터 2011년까지, 비교적 늦은 나이에(71~76세)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으로 재직했다. 예술의 완성도를 더욱 높여야 하는 사명이 부여된 시기이자 이들이 연주할 수 있는 좋은 음악이 한없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그는 뛰어난 안목으로 좋은 관현악곡을 만들 수 있는 작곡가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다. 국악관현악단이 연주하는 음악 세계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때 몇몇 작곡가가 황병기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 과정을 통해 관현악곡으로 무대에 오른 음악이 둘째 날에 연주된 나효신의 ‘태양 아래’와 임준희의 국악칸타타 ‘어부사시사’, 정일련의 ‘파트 오브 네이처’ 세 곡이다.


나효신의 곡은 그가 2006년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첫해의 기획공연 위촉 곡이었다. 네 개의 종교, 즉 도교·무교·불교·기독교를 소재로 위촉한 작품 가운데 나효신은 기독교를 주제로 ‘태양 아래’를 작곡했다. 그녀는 대한민국 작곡상을 양악?국악 부문에 걸쳐 수상한 바 있고, 우리 악기와 음악어법을 세련되게 풀어내는 작곡가다. 나효신의 음악은 둘째 날 첫 곡으로 연주하기에 더없이 적절했다. 장대한 관현악곡으로 창세기의 이야기를 펼쳐내면서 시작되는 음악은 국립국악관현악단이 탄탄하게 단련한 관현악 연주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여서 창세기적이라 할 만하다.


2011년에 초연된 정일련의 ‘파트 오브 네이처’는 원래 여섯 개 악장으로 구성돼 연주 시간이 80여 분에 달하는 대곡이나, 이번에는 4악장 ‘손(Hands)’만 연주했다. 이 곡에 ‘손’을 내준 연주자는 가야금 연주자 이지영,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이다. 초연 당시 모습 그대로다. 최고의 연주 실력을 자랑하는 두 연주자가 “태어나서 가장 어려운 연주”라며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이 표현에서 한편 이 곡의 깊이를 짐작해본다.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려 완성한 만큼 국악기의 음색을 충실히 드러내고자 한 작곡가의 의도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연주에 잘 담겼다.


임준희의 국악칸타타 ‘어부사시사’는 2010년에 초연된 곡이다. 고산 윤선도가 춘하추동 계절별로 10수씩, 총 40수로 쓴 시 가운데 18수를 골라 2시간에 달하는 대곡으로 만든 음악이다. 초연 당시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른 ‘어부사시사’는 서양악기와 국악기를 섞어서 연주했고 대규모 합창이 함께했으나 이번 공연에서는 ‘춘사·추사·동사’의 하이라이트만을 고르고 국악기 위주로 편곡해 연주했다. 서양악기로는 첼로와 더블베이스, 팀파니를 활용했고 합창도 규모를 줄여 여성 12명, 남성 12명만이 참여했다. 무대가 좁아 합창단을 남녀로 나눠 좌우에 배치했으나 의외로 효과는 더욱 좋았다. 윤선도의 시상과 임준희의 음악이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합창으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상당했다. 규모는 비록 축소됐으나 2시간짜리 곡 중 절정 부분을 엄선해 무대에 올린 음악에서는 압축된 음악적 에너지가 충실히 전달됐다.


2018 ‘마스터피스-황병기’라는 이번 공연의 중요한 지향 중 하나는 ‘미래’일 것이며 미래여야 할 것이다. 이미 마스터피스가 된 황병기의 여러 작품은 앞으로 계속 새로운 곡을 낳게 하는 씨앗이 되어 미래 음악계를 장식할 수 있다. 그러한 의도에 따라 이번 공연에서는 작곡가 임준희에게 곡을 위촉했다. 황병기의 대표적인 가야금 독주곡 ‘침향무’가 그 단서로 주어졌다. ‘침향무’는 임준희 음악의 새로운 단초(端初)가 되었다. 임준희는 ‘침향무’를 독주곡으로 생각하고 접근했다. 침향무의 선율이 중간 중간 들어가면서 새로운 곡이 될 수 있도록 구상했다. 선생께서 이 곡을 관현악으로 펼쳤다면 어떻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으셨을까. 그가 발산하는 마음의 향기를 따라갔다. 임준희는 “어느 정도 레퀴엠과도 같은 부분이 있지만 슬픔보다는 미래를 바라보고자 하는 생각”으로 이 곡을 썼다고 했다. ‘침향무’에 머무는 색깔, 그 곡이 머금고 있는 섬세한 향기와 그 곡의 영성(靈性) 등이 마음의 향기, ‘심향(心香)’이 되어 퍼질 수 있도록 곡을 썼다. 그 덕에 군더더기와 과장을 싫어하시던 선생의 향기가 곡에 올곧게 담겼다. 음 하나하나에 농축된 집중력, 그로 인해 도출되는 여운, 여운이 낳는 여백, 바로 그것이 녹아 있다. 임준희의 ‘심향’에는 황병기의 향기가 추억처럼 묻어 있었다. 스치며 살짝살짝 풍기는 향긋한 내음, 바로 그것이 ‘심향’에 담겼다. ‘심향’에서 우리는 멋스럽게 한 세상을 살다 간 작곡가 황병기의 향기를 추억처럼 연상한다. 그 추억은 달콤하다.

 

송지원 음악학자. 서울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국악방송에서 ‘연구의 현장’을 진행하면서 음악의 인문학적 지평을 확장하려 노력하고 있다. 음악인문연구소(音樂人+文硏究所) 소장으로 사람과 학문의 건강한 소통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음악의 거장들’ ‘조선의 오케스트라 우주의 선율을 연주하다’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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