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정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짚어 만드는 깊고 강렬한 농현이 마음 깊은 곳에 내버려둔 감정을 이끌어낸다. 스스로를 가리켜 ‘뿌리까지 국악인’이라 말하는 국립국악관현악단 아쟁 수석 강애진의 이야기는 그 악기와 꼭 닮아 있다.
첼리스트 요요 마는 실크로드 프로젝트 중에 한국에서 아쟁의 농현을 접하고 “5천 년 묵은 나무가 대지의 슬픔으로 큰 가지를 떠는 것 같다”라고 했다. 아쟁산조를 듣고 나니 한국인의 역사와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도 했다. 아쟁은 고독한 예술가처럼 그렇게 풍채 좋게 서 있다가도 활을 들어 긋기 시작하면 속에 품고 있던 것들을 절절히 풀어놓는다. 그래서 민족적인 한恨의 정서를 가장 잘 대변하는 악기로 꼽히다가도, 때때로 그 생김새 때문에 곧잘 서양악기인 바이올린이나 첼로와 비교되곤 한다. 이는 국립국악관현악단 아쟁 수석 강애진에게도 낯설지 않은 질문이다.
“아쟁 연주자로서 이런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어요. ‘아쟁 소리가 너무 좋아요.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요?’ ‘마치 첼로의 음색 같아요.’ 연주가 좋았다면서 관객이 제게 건네는 이야기가 보통 이런 것들이에요. 칭찬의 의미로 한 말인데, 어쩐지 들을 때마다 마음이 서글퍼지죠. 전 이제 이런 말도 모두 칭찬으로 여기기로 했어요. 우리 국악기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게 표현한 것일 테니까요. 한편으로는 아쟁의 음색이 그만큼 대중적으로 다가왔다는 의미이기도 하잖아요.”
그녀는 이내 바이올린과 아쟁을 비교해 설명을 이어갔다. 바이올린에 비브라토가 있다면, 아쟁에는 농현이 있다. 바이올리니스트의 화려한 비브라토가 음악에 새겨진 다채로운 표정을 표현해낸다 한들 음정을 하나하나 깊게 눌러서 내는 농현에 비교할 수는 없다고, 강애진은 힘주어 말했다.
“사람이 아픈 감정을 끌어안고만 있으면 병이 된다고 하잖아요. 아쟁의 농현이 그 감정을 끌어내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 국악이 좋은 거죠. 이태백·김영길 선생님과 같은 명인의 산조나 시나위를 듣고 눈물 흘리게 되는 것, 그게 아쟁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굉장히 인간적인 악기죠.”
어릴 적 강애진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다섯 살 적부터 피아노를 쳤고, 중학생이 돼서는 첼로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첼로를 전공하고 싶다는 그녀를 붙든 건 중학교 담임선생님이었다. 경쟁자가 너무 많은 악기인 데다, 지금 시작하기엔 늦은 감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음악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아이들의 진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선생님의 조언이었다. 대신에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진학을 권했고, 이곳에서 네가 꿈을 활짝 펼쳤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친구 하나 없는 외딴 학교에서 그녀가 처음 손에 잡은 악기가 아쟁이었다. 그전까지 국악예고에는 아쟁 전공이 없었고, 자연스레 강애진은 아쟁 전공생 1기가 됐다. 먼저 길을 걸어간 이 하나 없이, 처음 부임한 선생님들과 7명의 동기생은 서로를 바라보며 꿋꿋이 학교생활을 이어나갔다. 시작부터 부푼 꿈을 안고 아쟁을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아쟁을 품게 된 과정 자체가 행운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게 첫 스승인 김영길(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김도연(KBS국악관현악단 아쟁 단원)을 만났고, 두 선생에게서 박종선류와 김일구류를 모두 배우고 익혔다.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강애진이 본격적으로 음악에 눈뜬 건 대학에서였다. 대학 시절을 떠올리자면 실내악 앙상블 활동을 가장 먼저 꼽을 정도로 중앙대학교 동인 활동은 그녀의 음악 인생에 있어 단단한 중심축이 되어줬다.
“대학에서 한 창작음악이 음악 인생의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선후배와 동기들에게 얻은 것이 참 많은 대학 시절이었어요. 오늘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곡가 황호준,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타악 연주자로 있다 전주시립국악단 상임지휘자를 지내기도 한 박천지, 작곡가 강상구와 한 팀이었죠. 1년 내내 방학도 없이 함께 먹고 자면서 음악을 했어요. 흩어지면 죽는 줄 알던 시대였으니까요.(웃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유치한 음악인데, 그 음악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가 함께 이뤄낸 것들이 굉장히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팀 이름은 ‘꾼’이었어요. 음악적 자부심을 담았죠. 작곡가가 둘이나 있던 덕분에 다양한 음악을 시도해볼 수 있었어요. 황호준은 남도의 진한 감성을 담거나 사회참여적인 음악을 많이 썼고, 강상구는 맑고 아름다운 감성을 주로 표현했죠. 두 사람이 워낙 상반된 스타일이라 연주가 즐거웠어요. 특히 황호준 선배는 제게 정신적 멘토가 되어줬죠. 음악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좌절할 때마다 그 시절 선배가 해준 말을 떠올리면서 저를 단단하게 만들곤 해요. 대학에서 보낸 몇 년이 지금의 저를 세운 원천인 것 같기도 하네요.”
변화 속에서도 지켜야 할 것
1998년, 강애진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입단 시험을 치러 국립국악관현악단에 들어왔다. 그리고 햇수로 꼭 20년이 됐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연주자로 활동한 20년의 소회를 묻자 생각도 못한 질문이라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슴이 먹먹하다”라고 말을 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보냈는데 너무 바쁘게 살다 보니 뒤돌아볼 시간이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질문을 받고서야 다시 생각해보게 됐네요. 창단 초기에 관현악단은 그만의 즐거움이 너무나 컸어요. 악기 개량 초기 단계이기도 했고, 그에 맞는 주법도 개발되지 않은 때였죠. 지휘자부터 단원 모두가 하나가 돼 밤늦게까지 고민하면서 동고동락했거든요. 그래서인지 추억이 참 많아요. 이제는 세대가 완전히 바뀌었죠. 모든 것이 바뀌었어요. 음악 스타일부터 곡을 쓰고, 선정하고, 연습하는 방법까지 많은 것이 달라졌죠. 저는 그 중간에서 양쪽을 모두 경험한 세대예요. 마땅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때가 많이 그립기도 해요.”
초대 단장 박범훈을 시작으로 그간 여섯 명의 수장이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함께했다. 그 시간 동안 관현악단의 음악은 몸집을 변화시키며 다양한 관객과 만났다. 때때로 대중 곁에 아주 가깝게 다가가기도 하고, 우리 음악의 한계점과 도달점을 확인하기 위한 실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예술감독을 지낸 모든 분의 색깔이 분명해서 시기별로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방향성이 확실히 나뉘었던 것 같아요. 공연에 대한 평가도 참 다양했고요. 창단 초기 관현악단은 초대 단장인 박범훈 선생님이 만든 색깔을 유지·보수하는 데 중점을 뒀어요. 그러한 방향성이 이어지다가 변혁을 시도한 게 원일 감독님 때였죠. 처음엔 단원들과 부딪침이 심해서 어려움이 컸어요. 그런데 원일 감독님은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하건 꿋꿋하게 밀고 나갔죠. 그때 국립국악관현악단이 무척 신선해진 것 같아요. 뭐랄까, 다시 한번 살아난 느낌이랄까요. 그 변화가 너무 갑작스럽다 보니 힘들기도 했지만 단원들에게도 새로운 동기부여가 됐다고 생각해요.”
강애진은 미래를 막연히 긍정적으로 점치거나 희망적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답을 구하기 위해 지난날의 경험을 자주 꺼내놓았고, 그 목소리는 단호했다. 과거가 어떠했으니 미래는 더 나을 것이다, 라는 식이 아니라 그간 걸어온 길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정확하게 짚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회고에는 알게 모르게 아쉬운 기색이 묻어났다.
“전통성을 잃어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에요.”
그 이유를 알아내고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짧은 질문을 연달아 던지는 내 귀에 한마디 대답이 꽂혔다. 수백 년 역사를 품은 악기와 매일 마주 앉아 교감하는 그녀가 다름 아닌 ‘전통의 상실’에 대해 이야기할 거라곤 예상치 못했던 터다.
“최근 들어 드는 생각은 국립국악관현악단이 현대음악 쪽으로 중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거예요. 전통을 중심에 두고 현대음악을 시도하는 건 좋아요. 그런데 저는 그 범위를 너무 벗어난, 근본 없는 현대음악적 시도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 민족의 음악이니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요즘 음악은 이해하기 상당히 어려운 것 같아요. 관객들은 멋있다고도 하고, 어렵다고도 하죠.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은 ‘연주하면서 설레는 음악’이에요. 연주자에게 감흥이 없는 음악은 관객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해요. 국악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잖아요. 국악관현악의 뿌리를 잊지 않으면 좋겠어요.”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대학 강단에 서는 그녀가 학생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기초’와 ‘초심’이다. 더 잘 달리기 위해서는 잠시 속도를 늦추고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악관현악을 향한 강애진의 목소리는 그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 김태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무용이론을 공부하고 있다. 월간 ‘객석’과 서울문화재단?국립극장에서 잡지를 만들었으며,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제12회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사진 전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