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나이에 당차게 자신의 소리를 알린 소년이 있다. 세상의 바람보다는 자신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유태평양은 지금, 한 마리 고래처럼 유연하게 세상을 유영하고 있다.
차갑게 파란 하늘과 그 아래 요새처럼 자리한 국립극장을 배경으로 유태평양과 마주 앉았다. 늦은 오후에 시작한 인터뷰가 1시간을 넘어서자 하늘이 어스름히 물들었다. 저물녘보다는 여명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구름이 길게 비낀 하늘을 등지고 앉은 그가 페도라를 살짝 들어 머리칼을 한번 쓸어 넘기고는 입을 뗐다. 유태평양이 들려준 모노드라마의 시작이다.
소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느냐는, 예술가의 탄생에 관한 기본적인 질문은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미 세상의 빛을 보기 전부터 국악을 접했고, 젖을 떼기가 무섭게 조통달 명인을 할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다. 선생의 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주말이 돼서야 어머니를 만나던, 또래 친구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생활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을 이렇게 기억한다.
“‘예술 하는 사람은 특별함이 있어야 한다.’ 아버지께서 늘 그렇게 말씀하셔서 저도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외모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초등학생이 등교 전에 혼자 거울 보면서 빗에 무스를 뿌리고 머리를 세팅할 정도였으니까요.(웃음) 멋 내는 걸 참 좋아했죠.”
쾌활한 성격에 늘 “목소리 좀 줄이라”는 담임선생님의 타박 아닌 타박을 듣던 소년은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전 세계에 음악이라곤 국악밖에 없는 줄 알았다. 심지어 H.O.T.가 부르는 노래도 국악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당시 제7차 교육과정이 시행됨에 따라 국악 교육이 강화됐고, 음악 시간에 국악 동요가 나오기라도 하면 먼저 나서 너스레를 떨며 목청을 뽑았다. 이후 드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다른 장르의 음악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더 많은 종류의 음악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덕분에 그가 생각하는 음악은 더욱 다양해졌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발 디디고 서 있는 국악을 중심점으로 가닿을 수 있는 영역을 점차 넓혀간 것이다.
“어릴 적 인도에 공연을 갔다가 길거리에서 인도 전통 타악기 연주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아마도 제가 멋있다며 배워보고 싶다고 했나 봐요. 아버지께서 그걸 귀담아들었다가 유학을 제안하신 거죠. 원래는 인도를 염두에 두었는데, 기왕이면 타악의 뿌리인 아프리카 지역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셨다더라고요. 그 얘기가 나오고 나흘 뒤에 짐만 챙겨서 떠났어요. 초등학교에서 배운 5형식 영어가 전부라 당연히 의사소통도 힘들었죠. 처음 1년은 적응하느라 바빴고, 2년째부터 악기도 배우고 재즈밴드와 오케스트라 활동도 했어요. 아프리카 음악은, 이상하게도 뭔가 국악과 닮은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제 몸에는 항상 한국의 리듬이 춤추고 있으니 아프리카의 리듬이 들어오면 굉장히 이질적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런 느낌이 전혀 아니었어요. 아프리카는 3박 리듬을 많이 사용해요. 한국 장단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흥’의 요소가 매우 비슷해서 더 친숙하게 느낀 것 같아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고등 2학년(한국의 중등 3학년)까지 마치고 돌아온 유태평양은 그 시기에 한국에 있었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자신이 됐을 것 같다고 회상한다. 국악에 뿌리를 내리고 아프리카 음악에 가지를 뻗은 그는 또 한 번 음악적 확장을 꾀한다. 대학 시절 클래식 음악과 지휘를 공부한 것이다.
“어떤 음악에 대해서 나만의 해석을 내릴 줄 아는 게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지휘를 공부하고 싶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냥 듣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나라면 그 음악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공부하고 싶었죠. 지휘자는 손짓과 오케스트라를 통해 음악에 대한 해석을 구현하는 사람이잖아요. 지휘를 배우면 나의 음악적 표현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1, 2년 배운다고 되나요.(웃음)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것을 경험했어요. 클래식 음악을 듣다 보면 몇백 년 전에 어떻게 이런 음악을 만들었을까 싶어 감탄하곤 하거든요. 그런데 개인의 취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그 음악에 늘 젖어서 살기는 어렵더라고요. 국악은 하루 종일 들어도 지겹지 않은데 말이죠. 클래식 음악을 배우고 나니 오히려 국악에 애착이 생겼어요. 세상에 위대한 음악은 많지만, 내가 젖어 사는 음악은 국악이구나.”
제 나이에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
“무대에 설 때 떨리고 그런 건 없어요. 막 신나게 연주를 하고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날아갈 것같이 기분이 좋아요.”
아버지가 기록한 어린 유태평양의 모습이다. 1998년 여섯 살 나이에 3시간 길이의 ‘흥보가’를 완창하며 세간의 화제를 모은 소년이 당차게 소감을 밝히고 있다. 당시에 얻은 ‘국악 신동’이라는 타이틀은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의 이름 옆에 자리한다. 무르익는 성음만큼 예술가의 깊이도 더해진다고 믿는 소리예술에서 ‘신동’이라는 수식어가 마냥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신동’이라는 명칭은 당연히 부담으로 느껴지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아직 신동의 이미지를 벗어날 만한 예술가가 되지 못했음을 자각하게 되거든요. 어릴 때 특출하던 사람이 결국 그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주저앉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잖아요. 그런 상황을 공감하면서, 동시에 이를 이겨내고자 저를 다잡게 되더라고요. 대중이 제게 아직도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는 중압감도 느껴요. 양날의 검 같은 거죠.”
대학을 졸업한 뒤 유태평양은 국립창극단 입단 시험을 치러 2016년 신입단원이 됐다. 소리꾼으로 이미 이름을 날리던 차였기에 그의 입단 소식은 반갑고도 의아하게 다가왔다.
“어릴 때부터 국립창극단은 언젠가 꼭 들어가고 싶은 직장이었어요. 최고의 명인들이 거쳐 간 혹은 계신 곳이잖아요. 입단 시험을 치르기로 결정할 당시 국립창극단의 행보가 너무나 좋았어요. 제가 소리를 하면서 추구하던 지점, 진로의 방향성과 창극단이 최근 보여준 행보가 잘 맞는다고 생각했죠. 저 역시 대학을 다니면서 전통도 열심히 했지만, 영어 판소리나 1인 판소리극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었거든요. 지금의 국립창극단은 창극이라는 장르를 무한하게 확장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올해로 만 3년을 국립창극단에서 함께한 그는 “최고의 직장”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쉬지 않고 작품을 올리는 덕에 한 해가 한 달처럼 느껴질 정도지만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뿌듯하고 즐겁다고 했다. 그 모든 순간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꼽는다면 ‘심청가’라고 덧붙였다.
“대중적으로 보자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흥보씨’의 제비예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는다면 ‘심청가’를 택하고 싶어요. 그전까지 새로운 창극을 해오다가 오랜만에 아주 전통적인 창극을 선보이니까 이 작품이 더 돋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물론 일부 관객에게는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죠. 요즘 국립창극단 관객이 굉장히 젊고, 새로운 시도를 많이 기대하시니까요. 반면에 오래전부터 국립창극단을 지켜봐온 관객들은 화수분이 터진 듯 감탄한 작품이고요.”
오가는 질문과 답에서 그가 그저 공연을 올리는 것만이 아니라 관객의 반응까지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유태평양이 생각하는 오늘의 ‘창극’은 예술이라는 바다 위 어디쯤을 항해하고 있는 것일까.
“저는 국립창극단에서 시도하는 작품이 모두 좋아요.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국립창극단이라면 이런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요즘 관객들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하는 노력을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한 번씩 전통적인 것을 하면 그에 대한 파급력도 크고요. 지금까지의 여러 시도 속에서 창극단의 입지가 단단해졌다고 생각해요. 대중을 위해 설 것인지, 보존을 위한 단체로 나갈 것인지 고민하되 융합이 적절히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국립창극단 밖에서도 그의 움직임은 드넓은 바다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다. 2017 여우락 페스티벌에선 장서윤과 함께 ‘아는 노래뎐’이라는 공연을 직접 기획하고 출연했다. 대중성을 꾀한 작품이었다. 최근에는 KBS ‘불후의 명곡’ 등 방송에 출연하며 대중과 눈을 맞추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활동 속에서 그가 중심으로 두는 기치는 ‘도전’이다. 새로운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방점은 자신에 대한 도전에 찍혀 있다.
“요즘은 콘텐츠도 너무 많고, 고를 수 있는 것도 참 많죠. 어떤 것을 해도 신선하게 느껴지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음악, 타인의 시선이 아닌 제 자신이 느끼기에 도전이 될 만한 음악을 하고 싶어요. 그게 제 나이에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인 것 같아요.”
유태평양이 더는 ‘국악 신동’으로 불리지 않을 때, 또 어떤 수식어가 그의 이름 옆을 지키고 있을까.
“국악인이라는 이름도 당연히 좋지만, 좀 더 포괄적 의미에서 예술가로 불리고 싶어요. 국악을 전공하고, 국악을 사랑하고, 국악인으로 살고 있지만 그 자체도 음악의 한 장르이고, 예술의 한 부분인 거잖아요. 국악에 얽매이지 않고, 전통에도 매여 있지 않은 유연한 예술가의 삶을 살고 싶어요.”
그의 창창한 꿈이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는 한 마리 고래처럼 유연하게 세상을 헤쳐 나간다. 사람 좋은 그 웃음소리처럼, 유태평양의 앞날은 거침없다.
글 김태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무용이론을 공부하고 있다. 월간 ‘객석’과 서울문화재단?국립극장에서 잡지를 만들었으며,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제12회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사진 전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