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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3월호 Vol.350

떠날 수 없는 이들의 마음에 꿈의 촛불을 밝히다

삶과 노래 사이┃흥보가의 제비노정기

3월 3일 삼짇날이 되면 강남에서 돌아온다는 제비.

‘흥보전’의 대목 중 하나인 ‘제비노정기’에선 제비가 흥보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강남에서 출발해 중국 남방을 거쳐 조선 땅 흥보 집까지 비행한다.

그 여정을 상상하고 노래하던 옛사람들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여행을 떠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여행지의 아름다움,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담긴 유적, 위대한 예술 작품과 위인들의 흔적이 가득한 박물관, 아기자기한 기념품, 쾌적하고 편안한 숙소. 현대인들은 한 번 여행을 떠나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챙기고, 걱정하고, 예방하고, 계획해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배낭여행 마니아로 여행을 준비하며 했던 수많은 생각이 여행을 떠나는 순간부터 많은 부분 달라진 것을 기억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너무도 중요한 계획들,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가 머리에 가득하지만, 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아무리 힘든 기억도, 아픈 상처도, ‘웬만하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재해석되고 재구성되니까. 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장소의 기억’보다 ‘사람의 기억’이 더 진하게 남곤 한다. 가보지 못한 곳이라도 여행기나 영화 속에서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는 곳은 흡사 가본 곳만큼이나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다. 영화나 소설 속에 아름답게 묘사된 장소를 직접 가보면 그 감동은 마치 불꽃놀이처럼 알록달록하게 마음속에 추억의 무늬를 그려내곤 한다.

 

 

‘제비노정기’는 ‘흥보가’에서 흥보가 고쳐준 제비가 보은표 박씨를 입에 물고 중국의 남방에서 조선 땅 흥보 집까지 오는 여정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현재의 ‘제비노정기’는 고종 때의 명창 김창환이 다듬은 형태로 남아 있다. ‘제비노정기’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강남에서 출발한 제비가 중국의 명승지를 돌아보는 ‘중국노정기’로서, 단가 ‘소상팔경(瀟湘八景)’과 ‘심청가’의 ‘범피중류(泛彼中流)’ 등을 반영해 제비의 여정을 재구성한 것이다.

 

흑운 박차고 백운 무릅쓰고 거중에 둥실 높이 떠 두루 사면을 살펴보니 서촉(西蜀) 지척(咫尺)이요 동해 창망하구나.

이렇게 시작되는 ‘제비노정기’는 광활한 풍경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르는 제비의 역동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자신을 도와준 흥보를 돕기 위해 ‘행운의 박씨’를 물고 날아오르는 제비는 때로는 한시와 고사를 읊조리며, 때로는 흥에 겨워 온갖 명승지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며, 여행자의 낭만을 마음껏 만끽한다. 제비가 묘사하는 중국 호남성에 위치한 남악 형산의 최고봉이자 구운몽 첫 대목에 등장해 잘 알려진 축융봉(祝融峯)이나 순임금의 이비인 아황과 여영을 모신 사당, 황릉묘(黃陵廟), 최호의 시로 잘 알려진 황학루(黃鶴樓), 중국 자금성의 정전인 황극전(皇極殿) 같은 장소 중에는 조선 사신들의 여정과 겹치기도 한다.


두 번째 부분은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내려오는 ‘북방노정기’다. 이는 무가 ‘호귀노정기’의 여정과도 많이 겹치는데, 외래 신인 ‘천연두신’ ‘호구’가 사람들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내려오는 과정을 보여준다.

 

요동 칠백 리를 순식간에 다 지내여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다다라 영고탑(寧古塔) 통군정(統軍亭)을 올라보고 안남산 밖남산 석벽강 용천강 좌호령을 넘어 부산 파발 환마고개 강동(江東) 다리를 시각(時刻)이 건너 평양의 연광정(練光亭), 부벽루(浮碧樓)를 구경하고 (…) 문물이 빈빈(彬彬)하고 풍속이 희희(凞凞)하여 만만세지금탕(萬萬歲之金湯)이라.

 

쉴 새 없이 전개되는 이 숨 가쁜 여정 속에는 서북 지방의 아름다운 경치가 폭포수처럼 활기차게 펼쳐진다.
세 번째 부분은 드디어 흥보 집 가까이 가는 길, 한양에서 흥보 집에 이르는 ‘남방노정기’다. 이 부분은 ‘춘향가’의 ‘어사노정기(御史路程記)’의 앞부분을 차용한 것이다.

 

저 제비 거동봐라 박씨를 입에 가로 물고 남대문 밖 썩 나서서 칠패(七牌) 팔패(八牌 )배다리 애고개를 넘어 동작강 월강(越江) 승방(僧房)을 지나 남태령 고개 넘어 두 쪽지 옆에 끼고 수루루루루 펄펄, 흥보 집을 당도하여 안으로 펄펄 날아들어 들보 위에 올라앉어 제비 말로 운다 지지지지(知之知之) 주지주지(主之主之) 거지연지(去之年之) 우지배(又之拜)요 낙지각지(落之脚之) 절지연지(折之連之) 은지덕지(恩之德之) 수지차(酬之次)로 함지표지(含之匏之) 내지배(來之拜)요 삐드드드드.

 

제비가 자신의 은인 흥보에게 선물할 행운의 박씨를 물고 오는 길은 긴장감과 박진감이 넘친다. 제비 울음을 묘사하기 위해 반복되는 지之 자를 빼면 ‘알아보시겠어요? 주인님. 해가 바뀌어 또 인사드립니다. 떨어진 다리를 이어주셨으니 은덕을 갚으려 박씨를 물고 와서 절을 올립니다. 빼드드드드’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네 번째 부분은 마음씨 좋은 흥보가 자신을 기억하고 다시 찾아와준 제비에게 비할 바 없는 반가움을 표현하는 대목이다. 완벽하게 건강을 되찾아 가뿐하게 머나먼 여정을 날아온 제비를 칭찬하고, 그 아름다운 용기를 기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흥보가 보고 고이 여겨, 찬찬이 살펴보니 절골 양각이 완연, 오색 당사로 감은 흔적 아리롱 아리롱 하니 어찌 아니가 내 제비! 저 제비 거동을 보소. 보은표 박씨를 흥보 양주 앉은 앞에 뚝 때그르르르 떨리쳐 버리고 거중에 둥실 솟아 백운간으로 날아간다.

제비가 가볍게 날아오르는 모습은 마치 여인이 춤을 추는 듯 사뿐하고 경쾌하게 묘사되어 있다.

 

 

 

먼 곳에 대한 동경을 품은 가락
‘제비노정기’를 읽고·듣고·감상하다 보면, ‘가본 적 없는 곳이라도 이토록 아름답고 정감이 넘칠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옛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창조적이고 지혜로웠을까. 찢어지게 가난한 흥보는 물론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놀부마저도, 제비처럼 종횡무진 온 세상을 여행할 수는 없었다. 기차도 비행기도 인터넷도 없는 시절이었으니, 여행은 인간들보다 오히려 철새들이 더욱 확실한 전문가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제비노정기’를 들으며 어느 순간 울컥하는 감정에 사로잡혔는데, 그것은 ‘가볼 수 없는 곳,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을 이토록 다채로운 묘사로, 상상력 넘치는 문장으로 묘사하는 옛사람들의 못 말리는 낙천성과 명랑성이 너무도 눈물겹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비는 여행의 묘미를 아는 지혜로운 존재다. 제비가 ‘여행자’라면 흥보는 게스트하우스의 주인 같은 존재다. 배낭도 없이 단출하게, 그야말로 무일푼으로 여행하는 제비의 입장에서 보면, 다리까지 다쳐 목숨이 경각에 다다른 자신을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과 자비로 보살펴준 흥보는 그야말로 구원자나 다름없다.


흥보는 제비에게 먹을 것과 잘 곳, 그리고 ‘치유와 보살핌’을 선물해줬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여행의 준비물보다 더 결정적인 ‘여행의 핵심 요소’라 믿는다. 유난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는 그 모든 여행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이방인을 경계하지 않는 순박한 사람들, 인종과 성을 막론하고 지어주던 따스한 미소들,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마치 자신의 진정한 일부처럼 애지중지하는 수많은 현지인들. 이들의 자부심 넘치는 표정 속에서 나는 여행의 ‘장소’보다 더 소중한 ‘사람’의 힘을 보았다. 제비가 힘차게 날아오르며 온갖 명승지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때마다, ‘얼쑤, 좋다’ 하고 추임새를 넣었을 이들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아름다운 낯선 땅’을 상상하며 두근두근 설레지 않았을까. 그들의 심정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아주 머나먼 곳을 향한 멈출 수 없는 동경. 도대체 그곳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그곳에 가면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도 모르며, 과연 낯선 곳에서 병이 나지나 않을지 걱정의 먹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지만, 그래도 무작정 떠나고 싶은 여행자의 마음. 그 머나먼 곳을 향한 멈출 수 없는 동경을 ‘제비노정기’는 따스하고 간절하게 충족해주지 않았을까. 판소리의 흥겨운 가락에, 먼 곳을 향한 그리움과 목마름을 담뿍 실어 보낸 옛사람들의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다.

 

참고
김현주, ‘한국민속문학사전(판소리 편)’, 국립민속박물관, 2013.
정예진·배연형, ‘가야금병창(춘향가-흥보가)’, 법영사, 2006.

 

정여울 작가. 저서로 ‘마흔에 관하여’ ‘월간 정여울 시리즈’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등이 있다. 현재 네이버 오디오클립 ‘당신의 감성을 깨우는 글쓰기 프로젝트’와 KBS1라디오 ‘백은하의 영화관, 정여울의 도서관’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이세린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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