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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미르 상세

2020년 06월호 Vol.365

종이 위에 펼치는 퍼포먼스

안목의 성장 | 옛 문서 속 글짓과 몸짓

 

배치와 정렬, 레이아웃이 만들어내는 최고의 미학. 읽는 사람의 관점을 따라 다르게 흐르는 글과 그림을 입체적으로 즐기다       

 

 

‘정재무법呈才舞法’ ⓒ국립고궁박물관

 

병서兵書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1권 중 기창 총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중앙도서관

 

 

몸으로 읽는 글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궁중무용의 절차와 배치를 담은 문서인 ‘정재무법呈才舞法’을 직접 봤을 때, 정연하고 아름다운 글씨체와 잘 정돈된 배열 상태, 즉 레이아웃에 마음을 빼앗겨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봤다.
무동舞童들의 자리 배치에 관한 지침을 기록한 문서로, 가운데 글자 북을 여덟 명의 무동이 둘러싸고 있다. 무동들은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까? 모두 가운데 북을 바라보고 있다. 화살표 같은 보조 기호가 없어도 우리는 이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름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고 있어서다. 글자가 배열된 모양과 형식이 이런 의미까지 알려준다. 만약 우리가 오늘날 컴퓨터로 그런 자리 배치를 그린다면, 글자들을 모두 위에서 아래로 쓰고 화살표 등으로 방향을 표시하게 된다.
이 문서를 쓴 사람은 종이를 빙글빙글 돌려가며 글씨를 썼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만 흐르는 오늘날 문서의 한 방향 고정 시점과는 달리, 사방팔방의 방향성을 가진 다방향 다시점이 생겨난다.
우리가 문서나 책 속 긴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 몸은 고정되고 정지한 것 같지만, 눈동자도 움직이고 있으며 조용히 읽어도 소리를 시뮬레이션하고 있다. 문서를 작성하는 사람에게도, 그 문서를 바라보고 의미를 파악하는 독자에게도 몸은 개입한다. 그런데 서구와 동아시아의 옛 문서는 단지 언어와 문자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배열 방식이 다르고 몸이 개입하는 방식이 다르다. 우리 옛 문서 속에서는 몸이 더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더 활기찬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는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하는 몸의 움직임이 담긴다. 제목 그대로 당시의 무예들을, 그림인 도圖와 그래픽인 보譜로 집대성한 병서兵書다. 이 중 기창旗槍은 작은 깃발을 단 짧은 창을 다루는 무예를 뜻한다.
군사를 인물로 묘사하는 대신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진로를 글자로만 표시한 보를 보면, 방향을 틀 때는 글자가 책에서 거꾸로 누워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구식 문서 배치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장치로, 이런 방식을 지금 구사한다면 파격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문헌에서는 글자가 여러 방향으로 자유자재로 놓였기에 이렇게 몸의 진행도 한눈에 알아보기 쉽도록 표현해 낼 수 있었다.
로마자는 1차원 선형적인 전개 방식으로 출발해서 일렬로 놓인다. 한편 한자와 한글은 음절을 단위로 하는 정사각형을 기본 형태로 삼기에, 사방으로 펼쳐지는 전 방위 확장성을 가진다. 이렇게 서로 다른 문자의 공간적 속성으로 인해 전통 사회의 동아시아인들은 정보를 처리하고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도 달랐다.

 

 

 

 ‘온양별궁전도溫陽別宮全圖’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중앙도서관

 

‘시의전서·음식방문是議全書·飮食方文’에 실린 ‘반상식도飯床食圖’ ⓒ국립민속박물관 아카이브


물리적 제약에서 자유로워지다
앞의 두 문서는 무용하고 무예 수련을 하는 몸의 방향과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여기 이 지도 ‘온양별궁전도溫陽別宮全圖’에서는 공간과 건물만 있다.
사람은 보이지도 않지만, 그런데도 문서와 몸의 상호작용이 암시되고 움직임이 일어나 있다. 바깥쪽 담장 아래쪽 문을 주목해 보자. 문이 거꾸로 서 있다. 왜 그럴까? 가운데 큰 건물에서 사방에 난 문으로 빠져나갈 때 생겨나는 몸의 동선이 보이지 않게 표시된 것이다. 선이나 화살표조차 없어도 건물들이 향한 방향을 회전시킴으로써 진로가 암시된다. 각 건물의 이름을 적은 글자들 역시 해당하는 건물의 방향에 맞춰 때로 거꾸로 놓이기도 한다.
이것은 기운생동氣韻生動이란 미학적 가치관과도 상통한다. 동양의 전통 산수화에서는 시공간의 제약 및 무겁고 피로한 육신의 물리적 제한을 초월한 세계가 펼쳐져 있지 않은가. 고정되지 않은 다시점을 가진 동양 산수화를 바라보면 마치 산신령이 된 것처럼 이 산, 저 산, 폭포 여기저기를 마음껏 노닐 수 있다. 예술의 세계에서만큼은 그것을 향유하는 이들이 물리적인 현실의 제약을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한국의 옛 문서들을 펼쳐보면, 설령 단순한 원칙의 제약 속에서만 가능한 서구식 관점에서 과학적인 방식이 전개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그 속에 신체 및 눈의 제약을 초월하는 듯한 시각적 판타지가 펼쳐진다. 인간 몸의 한계 속에 머무르는 단일 시점 대신 독자에게 저 높은 곳에 위치한, 마치 산신과 같은 눈을 부여하고 있다.
‘반상식도飯床食圖’는 경상북도 상주에서 발견된 필사본에 실린 그림으로, 식탁 위에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을 놓는 방식을 보여준다.
밥상 위에서도 몸은 움직인다. 밥과 국은 먹는 사람의 몸을 향해 고정돼 있고, 다른 반찬들은 사방으로 바깥을 향해 누워 있다. 아마 밥상 위에서 젓가락을 쥔 손과 팔이 움직이는 방향을 암시한 것 같다.
한번은 늘 하듯이 글자를 위에서 아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리는 대신, 이렇게 방사형으로 놓는 그래픽을 컴퓨터로 만들어본 적이 있다. 이론적인 것을 몸을 써서 직접 실천해 보면 새로운 차원의 통찰을 얻게 된다. 현대적인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써서 이런 방식으로 문서를 만들면 고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뒤집힌 글자에서 오타가 나면 고치기도 번거롭다. 보는 사람에겐 편할지 몰라도 만드는 사람에게는 효율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사실 인간이 컴퓨터를 컨트롤한다고 생각하지만, 컴퓨터도 인간의 몸에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무슨 연유로 인쇄가 발명된 후에도 인쇄본이건 필사본이건 계속 저렇게 빙글빙글 돌려서 보는 방식의 문서를 만들었을까? 만드는 사람에게 이 방식이 번거롭다면 불편까지 무릅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전통 사회 한국인의 생활공간은 좌식인 문화였기에 이런 방식이 편리했던 것이다! 오늘날 컴퓨터 작업을 하면 앉은 사람의 자세도 고정돼 있고, 모니터도 수직 방향으로 고정돼 있다. 하지만 좌식 공간에서 낮은 상을 바라보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 생겨나고 종이를 돌리기도 편해진다.

 

 

최석정의 ‘구수략九數略’ 중 ‘낙서칠구도洛書七九圖’ ⓒ연세대학교 도서관

 

숫자로 피어난 타이포그래피
물리적 공간 속 사람의 움직임과는 전혀 무관한 추상적인 수의 세계에서도 숫자들은 방향을 가졌다. 숙종 대에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은 수학서 ‘구수략九數略’을 펴냈고, 뒷부분에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창의적인 마방진을 여럿 실었다. 방진方陣은 군사 배열에서 온 용어로, 수를 배열하는 방식이다.
최석정이 독창적으로 고안한 마방진의 한 예인 ‘낙서칠구도洛書七九圖’를 보면, 두 가지 형식의 마방진이 결합돼 있다. 꽃잎이 활짝 펼쳐진 듯한 꽃이 가로세로 셋씩 아홉 송이가 보인다. 이 아홉 송이의 중간에는
1부터 9까지의 숫자가 위를 향해 있다. 이것은 낙서洛書라는 마방진으로, 가로와 세로·대각선을 합한 수가 항상 15를 이룬다. 격자 배열이다.
각각의 꽃을 이루는 수는 일곱 개씩이다. 이 일곱 개 수를 더하면 아홉 송이 모두 항상 224가 된다. 이 꽃들은 방사형 배열을 이룬다. 격자와 방사, 두 가지 다른 배열 형식을 씀으로써 두 마방진이 한 평면 위에 서로 다른 레이어로 구분되도록 한 것이다.
무거운 가구라기보다는 언제든 움직이고 쉽게 옮길 수 있는 작은 탁자에서 작업을 했기에, 이렇게 탁자나 종이를 빙빙 돌리거나 스스로 몸을 이리저리 조금씩 움직였고, 그 결과 이런 글자 배열의 문서가 나올 수 있었다.
우리 옛 문서의 고정된 종이 위에서는 몸의 움직임이 퍼포먼스처럼 펼쳐지곤 했다. 글쓰기는 몸쓰기와 분리되지 않았고, 글짓은 몸짓과 혼연일체가 돼 그 뜻을 입체적으로 전하곤 했다.

 

유지원 타이포그래퍼. 전 홍익대학교 디자인학부 시각디자인전공 겸임교수. 민음사에서 디자이너로, 산돌커뮤니케이션에서 연구자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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