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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8월호 Vol.367

다시 소리의 뿌리를 단단하게

깊이보기 둘 | 국립창극단 시즌 프리뷰

국립창극단 ‘아비. 방연’

숨 하나 허투루 쉬는 일 없이 관객 마음을 향하는 우리 소리. 오늘날 창극은 표현의 영토를 조금씩 넓히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가 무대 위에 펼쳐지는 공연에 열광하던 일상의 평범함이야말로, 실은 가슴 깊이 감사했어야 할 선물이었다. 지난 5월 국립창극단 ‘춘향’ 공연은 목마른 관객에게 가뭄에 단비 같았다. 띄엄띄엄 ‘거리두기 좌석제’로 앉았지만, 모두의 입을 가린 마스크에도 아랑곳없이 어느 때보다 벅찬 환호가 극장을 가득 채웠다.
직접 작창을 맡은 유수정 예술감독에게도 ‘춘향’은 특별했을 것이다. ‘춘향’은 그가 지난해 4월 취임한 뒤 무대에 올린 첫 신작이었다. 사람들은 유수정 체제의 국립창극단이 보여줄 색깔과 스펙트럼의 지표로 ‘춘향’을 주목했다. 그는 정식 개막 전 프레스콜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연을 준비하며 단원들에게 줄곧 얘기했어요. 장단이 아무리 빨라도 느려도, 관객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의 공력과 시김새, 기술적인 면 같은 부분은 숨소리 하나까지 허투루 하는 일 없이 관객이 모두 다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요. 그런 소리를 들려달라고요.” 
‘창극이 무엇이냐’는 오래고도 새로운 우문愚問에, 그는 “시대가 바뀌면서 관객이 바뀌고 극도 바뀌지만, 중요한 건 그 안에 제대로 된 소리를 담는 것”이라고 현답賢答했다. 그의 답에 담긴 진심은 국립창극단이 국립예술단체로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협률사에서 처음 시험한 창극도 ‘춘향전’이었고, 1962년 국립국극단으로 출발할 때 창극단의 첫 작품도 ‘춘향전’이었다. 이번 ‘춘향’의 연출은 1998년 국립창극단의 완판장막창극 ‘춘향전’의 대본을 쓴 김명곤이 맡았다. 지난 시즌 마지막 작품이었던 ‘춘향’은 국립창극단의 시작이자 과거였으며 다가올 미래를 보여주는 출발점이 됐다.
돌아보면 2010년대 창극은 숨 가쁘게 전진했다. 한태숙 연출이 스릴러 창극 ‘장화홍련’을 무대에 올렸고, 차범석 원작 ‘산불’이 이성열 연출의 창극으로 다시 태어났다. 또한 해외 연출가들이 판소리 다섯 바탕을 해체해 재해석, 재구성했다.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 아힘 프라이어 연출의 ‘수궁가’가 찬반 논란을 불렀다. 싱가포르 연출가 옹켕센이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을 만들었고, 에우리피데스 작품을 바탕으로 한 ‘메디아’, 브레히트 원작의 ‘코카서스의 백묵원’도 창극으로 무대에 올랐다. 소리꾼 이자람은 동화 ‘빨간 망토’를 1인 창극 ‘소녀가’로 만들어냈고, 뮤지컬 연출가 김태형은 SF창극 ‘우주소리’를 탄생시켰다. 창극을 ‘여러 명이 나오는 판소리’ 혹은 ‘덜 까부는 마당놀이’ 정도로 여기던 편견은 깨져나갔다. 창극은 지금 가장 뜨거운 연출가들이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는 신세계이자, 새 작품을 올릴 때마다 회전문 관객이 생기고 ‘창극단 아이돌’을 사모하는 팬들이 길게 줄을 서는 흥행 장르가 됐다.

다시, 전통의 정통을 선보일 창극
이제 국립창극단은 다시 전진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를 다섯 작품과 ‘완창판소리’를 2020-2021 새 시즌의 그릇에 담는다.
기존 레퍼토리 두 작품이 먼저 온다. 먼저 10월 말 서재형 연출, 한아름 극본의 ‘아비. 방연’이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 실패한 단종 복위 거사를 배경으로, 단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딸을 지키기 위해 주군에게 사약을 전해야 하는 금부도사 방연의 이야기를 그린다. 서재형 연출의 창극 ‘메디아’에서 애절한 모성의 극치를 보여준 소리꾼 박애리가 작창을 맡았다.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일과 현실적 선택의 틈바구니에서 한계까지 내몰리는 방연의 모습은 지금 여기 평범한 부모들의 삶과 닮아 더 애달프다. 2015년 첫 공연 뒤 5년 만의 재공연이라 더욱 기대된다.
12월 초엔 ‘트로이의 여인들’을 공연한다. 2016년 초연 뒤 극찬을 받으며 유럽과 아시아 각지에 초청받아 공연한 그 작품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배삼식 작가가 새롭게 써내고, 명창 안숙선이 소리를 엮어 싱가포르 연출가 옹켕센이 빚어낸 작품. 영화 ‘기생충’의 음악감독으로 더 유명해진 정재일이 작곡과 음악감독을 맡는다.
이어서 신작 두 편이 온다. 내년 3월 국립창극단의 2021년을 열어줄 신작은 공연창작집단 뛰다를 이끄는 배요섭 연출의 ‘나무, 물고기, 달’이다.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에 대한 동양 설화가 모티프다. 배요섭은 ‘하륵이야기’ ‘휴먼 푸가’ 등 오래 공들여 올리는 작품마다 경계를 허무는 상상력으로 전인미답의 새길을 스스로 열어온 연출가다. 포항공과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나왔으며, 페르난도 아라발의 부조리극을 사랑하는 독특한 경력과 취향의 배요섭이 어떤 창극을 보여줄지 기대를 모은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고선웅 연출은 2021년 6월 새단장한 해오름극장에서 개막할 신작 ‘귀토’(가제)의 극본과 연출을 맡았다. 판소리 ‘수궁가’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시대상을 반영하고자 하는 작품이다. ‘귀토설화’는 ‘삼국사기’ 중 김유신전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의 이야기로, 이후 판소리 ‘수궁가’의 소재가 됐다. 일단 고선웅의 작품이라면 믿을 수 있는 데다, 스테디셀러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에서 고선웅 연출과 호흡을 맞췄던 음악감독 한승석이 예술감독 유수정과 공동 작창을 맡았다.
2021년 4월엔 새로운 형식의 2인 판소리 공연 ‘절창’이 예정돼 있다. 국립창극단의 젊은 소리꾼 두 사람이 판소리 다섯 바탕의 눈대목을 뽑아 부르고, 동시대의 시각예술이 어우러진다. 젊어진 전통과 최신의 예술 실험이 만나는 무대가 될 것이다. 더하지도 덜어내지도 않은 진짜 우리 소리가 그리운 관객들을 위한 ‘완창판소리’ 무대도 ‘송년판소리’를 포함해 올 9월부터 2021년 6월까지 8차례 예정돼 있다.

이태훈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짧고 가벼운 것을 선호하는 시대여도 여전히 굵은 이야기의 힘을 믿으며, 글이 무대와 관객을 잇기를 소망하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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