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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호 Vol.370

장수를 기원하며 연을 베풀다

경계를 넘는 예술 | 경희궁의 경로잔치

경현당석연도

 

기해기사첩을 통해 본 조선 시대 기로소 입소 풍습을 그림으로 남기다

 

1719년은 숙종 임금이 14세에 등극해 왕 자리에 오른 지 46년째 되던 해이자 육순六旬이 되는 해에서 1년 모자란 59세 되던 해다. 숙종이 어찌 감회가 없을 수 있었겠는가. 46년이란 시간은 이전 선조 임금이 재위한 42년을 뛰어넘는 기록이었고, 그동안 60세를 넘긴 유일한 임금은 태조 이성계밖에 없었다. 한편 태조는 60세 되는 해에 기로소耆老所를 만들어 들어가는데 기로소란 문신 가운데 품계가 정2품 이상이고 나이는 70세 이상인 신하들이 들어가는 ‘고위 고령 관료 모임’이었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원로원’에 해당할 것이다.

 

300년 만의 국가 경사
조선은 노인을 우대하는 유교 국가였고 지배층이 모두 관료인 관료 국가였기 때문에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은 개인의 영광이자 가문의 영광이었다. 임금은 신하들과 달리 60세에 기로소에 들어가는데 태조 이후 숙종 이전 현종 때까지 어느 임금도 기로소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숙종이 59세를 맞이한 것은 300년 만의 국가 경사였다. 여기서 드는 생각은 아직 60세까지 1년 남았는데 종친과 신하들이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청한 것은 아마도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라 서두르지 않았나 싶다.

 

경현당석연도 세부. 정면이 임금의 자리이고 오른쪽이 왕세자의 자리인데 모두 인물은 표현하지 않았다. 임금과 왕세자는 감히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임금 자리 앞 양쪽에는 별운검이 보검을 어깨에 매고 있다

 

기로소에 입소하다
숙종의 기로소 입소 행사는 1719년 기해년 2월 11일에 치러졌다. 기로소 입소 행사는 어첩御帖을 기로소에 봉안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어첩 봉안은 기로신耆老臣 7명이 참여한다. 기로소는 한성부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었는데 오늘날 광화문 교보빌딩과 kt 본사 빌딩 사이쯤이라고 한다. 어첩을 봉안하고 다음 날인 2월 12일에 임금은 기로소에 들어가는데 기로신들이 임금의 기로소 입소 축하 인사를 올리는 진하전進賀箋이 경덕궁慶德宮 숭정전崇政殿에서 열린다. 경덕궁은 경희궁慶熙宮의 원래 이름으로 광해군이 1616년에 완공해 이후 이궁離宮으로 사용하는데 중요한 사실은 숙종이 이곳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바로 옆 건물인 융복전隆福殿에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 또한 숙종 평생에 일어난 여러 사건 가운데 기억할 만한 일이다. 숙종이 즉위한 곳은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이고, 숙종 33년(1707)까지 지낸 곳 역시 창덕궁이었는데 이해 7월 26일 숙종은 창덕궁에서 경덕궁으로 이어移御하게 되고, 50세 기념 진연進宴부터는 경덕궁 정전인 숭정전에서 거행한다. 그래서 숙종의 기로소 입소 축하 인사 자리도 숭정전에서 마련된 것이다. 이때 숙종은 반교頒敎하기를 “노인을 숭상하는 풍속이 이로부터 다시 나타날 것이다”라고 하여 자신의 기로소 입소의 의미를 밝혔다.

 

기해년 기사에서 일어난 모임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가고 나서 2개월 후인 4월 18일에는 숙종이 기로신들에게 잔치를 베푸는데 이것은 경덕궁 경현당景賢堂에서 열린다. 그래서 이를 ‘경현당석연景賢堂錫宴’이라 한다. 이날 참여한 기로신은 모두 10명이었고 당연히 왕과 세자도 참석했다. 기로신은 모두 11명이었지만 1명은 시골 향장에 가 있어 같이하지 못하고 10명만 참석했다. 잔치를 마친 기로신들은 임금이 하사한 은술잔을 가지고 기로소로 돌아와 2차로 연회를 연다. 이를 ‘기사사연耆社私宴’이라 한다. ‘기사耆社’는 기로소의 다른 말이다. 이렇게 해서 숙종의 기로소 입소와 관련된 모든 행사는 끝나고 이후 기로신 11명은 일련의 행사 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담은 첩을 꾸미게 되니 이를 기해년에 기사에서 일어난 모임을 담은 첩이라 하여 ‘기해기사첩己亥耆社帖’이라 한다. ‘기사첩’은 기로신이 11명이니 11부에다가 기로소에 보관하는 1부까지 더해 총 12부를 만들었고, 첩 속에는 기로신 10명의 초상화도 같이 들어 있다. 아무튼 ‘기사첩’ 속 행사 그림은 총 다섯 장면으로 2월 11일 ‘어첩봉안도御帖奉安圖’, 2월 12일 ‘숭정전진하전도崇政殿進賀箋圖’, 4월 18일 ‘경현당석연도景賢堂錫宴圖’ ‘봉배귀사도奉盃歸社圖’ ‘기사사연도耆社私宴圖’이고 이 가운데 2번의 잔치 그림인 ‘경현당석연도’와 ‘기사사연도’를 살펴보자.

 

경현당석연도 세부. 세 줄로 선 악공의 배치를 보면 맨 앞은 현악기군, 다음이 관악기군, 마지막이 타악기군으로 서양의 오케스트라 악기 배치와 비슷하다. 무동과 처용무인들은 모두 오방색으로 옷을 입었다

 

경현당석연도
경현당 정면 3칸 문을 모두 떼어내고 건물 앞에 흰 차양을 쳤다. 경현당 앞에 나무판을 넓게 깔아 가설무대를 만들었는데 이를 보계補階라 한다. 보계에 오르는 나무 계단은 좌우에 하나씩 있고 아래에는 두 개가 있다. 경현당 안에는 정면에 임금의 찬탁饌卓이 반만 보이고 이는 일월오봉병풍도 마찬가지다.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 숙종에게 제조提調가 술잔을 바치는 장면이 있고, 임금 왼쪽에는 세자의 찬탁과 돗자리가 있는데 세자 역시 보이지 않는다. 임금이건 세자건 그림에 표현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무대 가운데에서는 붉은 옷을 입고 머리에 화관을 쓴 무동舞童 둘이 양손을 들고 춤이 한창이다. 이 양쪽으로 녹색 단령을 입고 사모를 쓰고 머리에 꽃을 꽂은 기로신들이 앉았는데 임금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왼쪽에 넷, 오른쪽에 여섯이 앉았다. 이는 이날 10명의 기로신 가운데 정1품이 모두 4명이었다는 것을 알면 자리 배치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다. 기로신 11명의 좌목座目이 ‘기사첩’ 안에 있기 때문에 이들 정1품 4명이 누군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4명 가운데 마지막 1명은 3번째 기로신과 자리를 좀 떨어져 앉았다. 그렇다면 정1품 안에서도 서열이 있단 말인가. 역시 이번에도 좌목의 품계 이름이 실마리를 준다. 앞의 기로신 3명은 모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 품계이고, 4번째 기로신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이다. 즉 정1품에서도 상계와 하계로 나뉘는 것이다. 이것으로 조선이 품계에 의한 완전한 관료 사회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의 여섯 명은 자리 간격이 차이가 없는데 이들은 종1품 한 명, 정2품 다섯 명이다. 그런데 10명의 기로신이면 정1품과 종1품 다섯 명을 왼쪽에 앉히고 정2품 다섯 명은 오른쪽에 앉히면 양쪽이 균형이 맞을 텐데 굳이 이렇게 자리를 배치한 걸 보면 역시 정1품이 최고의 품계로 당상관 가운데에서도 당상관임을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좌우 기로신 앞에도 푸른 옷의 관료가 무릎을 꿇고 술잔을 올리고 있다. 


아래에는 무동 여덟이 박拍을 든 악공樂工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나란히 섰다. 그런데 옷 색깔을 보니 백색·흑색·황색·청색이다. 무대에 오른 무동의 적색까지 더하면 오방색이 된다. 그렇다면 춤이 다섯 번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인데 아마도 적색 무동이 제일 먼저였을 거고 백색 무동이 가장 마지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보계 오른쪽 구석을 보면 얼굴에 처용탈을 쓴 인물 다섯이 한 줄로 서서 무대로 막 들어올 채비를 하고 있다. 이들은 바로 처용무處容舞를 추는 무인舞人들이다. 그렇다면 다섯 번의 무동춤과 한 번의 처용무였을 텐데 어떻게 음악과 춤이 진행됐을까. 이날 잔치의 자세한 과정이 당일자 실록 기사에 실려 있어 잔치에서 공연된 음악과 춤의 전모를 알려준다. 이날 잔치에서는 총 다섯 번에 걸쳐 임금에게 술잔을 바쳤다. 술잔마다 음악과 춤을 바꿔가며 공연하는데 마지막 다섯 번째 술잔은 좀 특별했다. 이 마지막 술잔은 임금이 기로소에 내려준 은술잔을 사용했는데 이 술잔이 다른 술잔보다 커서 한 잔 마시고 나면 다들 취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은술잔이 모두 돌고 나면 음악은 ‘여민락與民樂’으로 바뀌면서 드디어 오늘 공연의 마지막 춤인 ‘처용무’가 등장했다. 그러니까 음악에서는 여민락, 춤에서는 처용무가 그날 공연의 백미白眉인 셈이다.

 

기사사연도 세부. 처용무인들이 자신의 옷 색깔에 해당하는 방위에서 춤추고 있다. 중앙은 황색,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이다. 화원畵員의 탁월한 연출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악공의 배치
그러면 이날 음악을 맡은 악공들의 배치와 악기 구성을 살펴보자. 무동들 뒤에 붉은 단령과 검은 복두를 쓴 악공들이 세 줄로 자리했고, 맨 마지막 줄은 보계 아래로 내려왔다. 맨 앞줄은 현악기군이다. 가운데 북을 중심으로 좌우에 거문고·비파·해금·비파·해금 등 총 10개의 현악기가 자리했다. 특이한 것은 거문고를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서서 연주하는 점이다. 모든 악공이 서서 연주하기 때문에 이와 짝을 맞춘 것인데 그동안 거문고는 바닥에 앉아 연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약간 놀라운 모습이다. 두 번째 줄은 관악기군이다. 가운데 넷은 장고杖鼓이고 이들 좌우로 피리·대금·대금의 구성이다. 한편 이들 악공 양 끝에는 녹색 단령과 자색 두건을 쓴 이들이 각각 2인씩 있는데 이들은 노래 부르는 ‘가동歌童’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보이소프라노합창대’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 세 번째 줄은 타악기군이다. 가운데 커다란 북을 중심으로 좌우에 작은북·편경·편종이 각각 자리했다. 재미난 점은 서양 오케스트라 악기도 맨 앞이 현악기, 다음이 관악기, 마지막이 타악기 구성인데 우리도 비슷하다. 아무튼 이날 총 등장한 악기는 여러 북을 하나로 친다면 모두 9종이 된다. 처용무를 끝으로 찬탁이 거두어지고 잔치는 끝나는데 이때 기로신 가운데 서열 2위인 영의정이 임금께 아뢰길 “내려주신 은배銀杯를 가지고 기로소의 작은 모임에 나아가 남은 기쁨을 다하여 성상의 은혜를 자랑하고자 합니다”라고 하면서 ‘법악法樂’을 청하니 임금은 “악부樂部를 데려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허락한다. 여기서 악부란 악공과 무인舞人 모두를 말한다. 이렇게 해서 기로신들은 무동과 처용무인과 악공들을 앞세워 기로소로 돌아온다. 이렇게 해서 오늘의 두 번째 잔치인 ‘기사사연도’로 넘어간다. 


아무튼 기로소 잔치는 모든 면에서 경현당 잔치와 비교해 규모가 작았다. 장막은 쳤지만 보계는 설치하지 않았고 무동과 처용무인의 숫자는 같지만 악공의 숫자는 28명에서 19명으로 줄었다. 편경과 편종·거문고·큰북 등은 빠지고 관악기와 현악기가 서로 섞여 두 줄로 자리했다.

 

처용무를 그리다
또 하나 차이점은 무동의 춤은 당 안에서, 처용무는 마당에서 동시에 진행된 점이다. 실제로 이랬는지 아니면 따로따로인데 화가들이 동시에 그렸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처용무는 당 안에서 하지 않고 마당에서 했을 거라는 점이다. 당 안에 다섯 명이 동시에 들어가기엔 좁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처용무인의 자리를 옷 색깔대로 좌청左靑·우백右白·남주南朱·북현北玄·중황中黃으로 맞춰놓았으니 이 그림을 그린 화원 화가들의 놀라운 연출력에 감탄할 뿐이다. 당 안에는 기로신들이 경현당의 경우처럼 4명과 6명으로 자리했는데 이번에는 남쪽에도 7명이 나란히 앉았다.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이들의 정체 역시 ‘기사첩’ 안에 나와 있다. 첩에는 다섯 번의 행사 때 참석한 인원들이 두 면에 걸쳐 나오는데 기로소연회시 인원 항목에 기로신 10­명 이외에 이 잔치를 꾸민 호조판서와 기로신 자제 다섯 명의 이름이 나온다. 역시 조선 시대는 기록 사회였다. 기록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순간이다. 


‘기사사연도’의 백미는 마당 한 켠에서 악공들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백발의 두 노인이다. 맨발에 지팡이를 짚은 오른쪽 노인은 몸을 가누기도 쉽지 않은 듯 보이지만 흥에 겨워 있고, 왼쪽 노인은 양팔을 얼쑤하며 신이 났다. 기로소가 노인을 공경한다는 경로사상의 상징 장소라면 조정朝廷의 가장 높은 관료들의 잔치에 저 두 백발 노인이 자유롭게 노는 장면이야말로 이 기사첩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큰 가르침일 것이다. 이날 잔치를 구경하기 위해 기로소 마당 안에 들어온 여러 계층의 사람들 모습에서 다 같이 하나 되는 대동大同사회를 이상으로 여긴 조선 사회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잔치에서 연주된 음악 이름처럼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여민락’의 정신이 아니던가. 아! 이제 왜 기로소에서 2차 잔치를 벌였는지 이해됐다. 노인을 공경하는 잔치를 음악과 춤을 곁들여 여러 백성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탁현규 간송미술관 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동덕여대에 근무 중이다. ‘그림소담’ ‘고화정담’ ‘사임당의 뜰’을 펴냈다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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